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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전시회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by Exhibition_Tistory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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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시회를 다니며 기록을 남기고자

만들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종료된 전시회이며,

못 가셨던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장 내 작품들은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작품 96점 전체 올렸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있던 포토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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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 10세기 스위스 북부 지역의 백작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3년 루돌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동쪽 영역'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출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을 잇는 후예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력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더 멀리'라는 좌우명을 가진 가문답게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후, 점점 세력을 넓힙니다. 마침내 16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룹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계보도>

 

 

1. <막시밀리안 1세>

베른하르트 슈트리겔(1460-1528), 원작을 모사

1508년 이전, 나무에 유화

: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강력한 제후 세력과 맞서야 했고 실질적인 통치력은 약했다. 1508년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는 군주의 권위와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황제의 홀을, 왼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쥐고 '명예의 천'이라 부르는 화려한 붉은색 천을 배경으로 서 있다. 이러한 양식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설계자 막시밀리안 1세>

: 신성로마제국 황제 역시 다른 군주처럼 자신의 공국만을 다스리는 특별하지 않은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150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막시밀리안 1세는 나름의 비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결혼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동맹을 맺어 제후들이 무시할 수 없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군트 공국을 얻었고, 아들과 딸을 스페인 왕실의 공주, 왕자와 결혼시켜 스페인 왕국 전체와 식민지 영토까지 얻었습니다. 거기다 손자와 손녀는 보헤미아 왕실의 공주, 왕자와 결혼시켜 동유럽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의 패권을 쥘 수 있도록 기초를 다진 진정한 설계자였던 셈입니다.

 

 

2. <켄타우로스 에우리티온을 죽이는 헤라클레스>

안토니오 수시니(1558-1624)

1600년경, 청동

: 에우리티온은 올레노스의 왕 덱사메노스의 딸과 결혼하고자 왕을 위협하지만 헤라클레스와 결투를 벌여 결국 죽는다. 조각은 헤라클레스가 켄타우로스를 죽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수시니가 그의 스승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궁정 조각가 잠볼로냐(1529-1608)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눈에 눈동자와 홍채를 새긴 것은 수시니 작품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카를 5세는 고대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용맹함에 빗대어 절대적인 황제의 통치력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3. <헤라클레스>

16세기 후반, 대리석

: 고대 영웅 헤라클레스는 그의 상징인 사자 가죽이 걸린 기둥에 기대서서 생각에 잠겨 있다. 오른손을 무심히 등 뒤에 대고 마치 영웅으로 보낸 지난날을 회상하듯 생각에 잠겨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헤라클레스를 근육질로 표현한 고대 그리스 조각과 달리, 날씬한 골격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카를 5세(1500-1558)는 영웅으로서 헤라클레스를 자신의 모습으로 즐겨 사용했다고 하여, 조각상의 얼굴이 황제를 연상시킨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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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취향을 담다, 프라하의 '예술의 방'】

: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구교와 신교의 대립 속에서 합스부르크는 구교의 수호자로서 반종교개혁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종교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가졌고, 그를 신뢰하지 못한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는 결국 구교를 신봉하겠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는 스페인의 왕이자 사촌인 펠리페 2세에게 엄격한 후계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우울한 기질이었던 루돌프 2세는 정치적으로는 무능력했지만 예술품 수집가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는 프라하로 수도를 옮긴 후 수많은 예술가를 불러들여 후원했고, 이렇게 수집한 예술품들을 그의 '예술의 방'에 전시했습니다.

4. <마티아스>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1535년경-1597)

1583년경, 캔버스에 유화

: 마티아스(1557-1619)가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그의 궁정 화가였던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가 그린 것이다. 그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동생이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마티아스는 헝가리 신교 진영 세력을 규합해 160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611년에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고 결국 161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오히려 신교 진영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 30년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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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은 패션이다】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갑옷은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 중 하나였습니다.

전투 때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갑옷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행사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에 유행한 마상 시합이었습니다.

마상 시합의 형식에 따라 특화된 갑옷이 필요해 주로 부품을 조립식으로 제작했습니다. 부품 수가 많을수록 비싸고 기능이 다양한 갑옷으로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전투를 위한 목적만이 아닌 시대의 패션으로서 유행에 따라 갑옷의 형태도 달라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수집품입니다.

5. <막시밀리안 1세의 갑옷>

로렌츠 헬름슈미트(1450-1515)

1492년경, 강철, 황동에 도금, 가죽

: 1508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1490년대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를 지배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전하는 갑옷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갑옷 제작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릎 보호대 양쪽에는 돋을새김이 장식되어 있다. 로렌츠 헬름슈미트는 막시밀리안 1세의 황실 갑옷 장인이었는데 로렌츠 가문은 16세기 중반까지 합스부르크 황제들을 위해 갑옷을 제작했다.

 

 

6. <사브르>

1560년경, 코듀로이 직물, 철, 금, 은, 아말감 도금, 나무

: 사브르란 날이 휘어진 긴 칼이다. 전투용이 아니라 고대인처럼 꾸미는 축제 행렬에서 의장용으로 착용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칼은 르네상스 초기에 나타난 것이지만, 16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고대의 무기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이 사브르는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의 아들이자 루돌프 2세(1552-1612)와 마티아스(1557-1619)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1527-1576)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 <루돌프 2세의 '리본 장식' 갑옷>

안톤 페펜하우저(1525년경-1603)

1571년경, 연철, 금, 황동, 직물, 가죽

: 갑옷 전체를 장식하는 금색 리본과 잎 무늬가 인상적이다. 리본 장식을 의미하는 '플레히트반트'라는 갑옷 이름은 이 장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마상 창 시합용 갑옷은 중세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강철 치마가 없는 구조로 제작되어 지상 결투에 적합하도록 했다.

막시밀리안 2세(1527-1576)가 1570년 열린 동생 카를 2세 대공(1540-1590)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1551-1608)의 혼인식 기념 축제에 참여하는 아들 루돌프 2세를 위해 이 갑옷을 주문한 것으로 추측한다.

 

 

 

8. <세로 홈 장식 갑옷>

빌헬름 폰 포름스 1세(1501-1537)

1525-30년경, 연철, 가죽

: 갑옷 표면의 세로 홈은 당시 의복의 주름 장식을 모방한 것이다. 홈 장식은 빛을 반사해 표면을 빛나게 하는 효과를 내고 갑옷의 강도를 높여 보호 기능을 강화했다. 얼굴 표정을 연상하게 하는 투구는 마상 창 시합과 함께 열린 가면극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갑옷은 뷔르템베르크의 울리히 공작(1487-1550)이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그의 손자가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68)에게 선물한 것이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티롤의 암브란스 성에 "영웅들의 무기고"를 지어 무기와 갑옷을 수집하고 전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9.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

외르크 조이젠호퍼(1528-1580)

1547년, 연철, 아말감 도금, 황동, 가죽, 천

: 현존하는 르네상스식 갑옷 세트 중 가장 큰 것으로, 총 90개의 부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독수리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어 <독수리 갑옷>으로도 불린다. 이 갑옷은 페르디난트 1세(1503-1564)가 아들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을 위해 황실 갑옷 제조공 외르크 조이젠호퍼에게 주문해 제작된 것이다.

 

 

 

<마상 시합의 종류>

: 마상 시합은 11세기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형식을 갖춘 것은 막시밀리안 1세 때였습니다.

마상 시합은 본래 훈련의 일종으로 시작되었으나, 개인의 용맹함과 무예를 드러내고 역동적인 경기를 관람자에게 보여줄 수 있어 크게 유행했습니다.

마상 시합에는 크게 네 종류가 있습니다.

1. 날카로운 창으로 하는 마상 시합

(날카로운 창으로 상대의 방패나 머리를 공격해 마레서 떨어트리면 점수를 얻는 시합)

2. 보호대를 씌운 창으로 하는 평화 시합

(창끝에 뭉툭한 보호대를 씌우고 공격해 상대를 말 아래로 떨어트리면 점수를 얻는 시합)

3. 지상 결투

(말을 타지 않고 지상에서 검으로 결투해 승패를 가리는 시합)

4. 자유 마상 시합

(창으로 하는 시합과 지상 결투를 결합한 형태의 시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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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와 '예술의 방'】

: 루돌프 2세는 예술에 탁월한 안목을 가진 황제로 평가 받습니다.

그는 스페인 왕궁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예술을 탐독하며 성장했습니다. 1576년 황제가 된 후, 수도를 프라하로 이전하여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을 불러들였고, 프라하를 보헤미아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폭넓고 깊은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회화부터 진기한 공예품, 학문적 성과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해 '예술의 방'에 전시했습니다. 루돌프 2세의 수집품은 현재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을 만드는 데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술 후원자이자 수집가로서 그가 남긴 문화유산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10. <누금 장식 바구니>

16세기 후반, 금

: 작은 크기의 바구니는 꽃과 잎 무늬의 가는 금줄과 작은 금 알갱이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금 세공으로 섬세하게 작업한 이와 같은 금세공 작품은 장식용으로 수집되어 17세기 유럽에서 수요가 많았다. 루돌프 2세 황제는 이 작품을 가장 특별한 예술품만을 모은 소장품집에 포함시켰다. 17세기 당시 이러한 예술품은 대부분 고아를 중심으로 한 인도 서부에서 생산되어 리스본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으로 여겨졌고, 루돌프 2세의 소장품집에도 인도의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11. <루돌프 2세>

마르티노 로타(1520년경-1583)

1576-8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던 마르티노 로타가 황제 즉위를 기념해 제작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군주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루돌프 2세 치세에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또 13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튀르크 전쟁에서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무능한 황제라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모태가 될 정도로 그의 예술가적 감식안은 높게 평가된다.

 

 

 

12. <누워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조반니 암브로조 미세로니 추정(1551년경-1616)

1600-10년, 옥수

: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인 옥수(玉髓) 한 덩어리를 인체 표현과 움직임을 정교하게 살려 만든 작은 조각상이다. 두 인물에 맞게 재료의 자연적인 색채를 그대로 살린 조각가의 방식도 놀랄만하다. 조반니 암브로조는 1600년부터 밀라노에 미세로니 가문 공방을 이끌었던 인물로, 당시 재료의 질감을 잘 살려 실력이 뛰어난 석공으로 평가받았다.

 

 

 

13. <마노 그릇>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

1615-24년, 이끼 마노, 은, 도금

: 그릇 바깥 면을 두르는 소용돌이 띠무늬와 정교하고 얇게 깎은 가장자리는 오타비오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이 그릇의 금속 장식은 'HC'라는 머리글자를 쓴 제작자가 한 것으로 작품의 받침대에 서명이 남아 있다. 이 제작자의 특징은 그릇과 받침대를 연결하는 도금 은제 장식에 투각 장식이 된, 긴 암술대 모양의 장식을 더하는 것이다. 밀라노 출신 석공 오타비오 미세로니는 루돌프 황제의 요청을 받아 프라하에 공방을 차려 작업했고, 프라하가 유럽 석조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 데에 일조했다.

 

 

 

 

 

14. <조가비 모양 그릇>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

1610-22년경, 연옥, 은, 도금

: 조가비 모양의 그릇을 장식하는 아칸서스 나뭇잎과 소용돌이 띠는 미세로니 가문이 공방에서 즐겨 사용했던 무늬 양식이다.

오타비오는 깎기 어려운 단단한 연옥을 사용했지만 마치 점토를 반죽한 것처럼 부드러운 형태의 그릇을 만들어냈다. 그릇 위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포세이돈)가 있는데, 은에 도금한 이 금속상은 오타비오가 사망한 후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한다. 루돌프 2세(1552-1612)가 서거한 후, 이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미세로니의 공방에 남겨졌다가 빈으로 옮겨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5. <연수정 꽃병>

디오니시오 미세로니(1607 추정-1661)

1652년, 연수정, 은, 도금

: 하나의 큰 연수정 덩어리로 병의 몸통을 만들고 여기에 나뭇잎 무늬 입구와 손잡이, 받침대 금속 장식을 붙여 완성했다. 몸통에는 소용돌이와 괴수 얼굴을 닮은 무늬가 교차하고 옆면의 손잡이 가장자리 부분에는 과일 바구니 무늬가 있다. 빛의 굴절과 반사, 투명도를 이용해 연수정의 특성을 살려 제작됐다. 루돌프 2세(1552-1612)의 황실 석공 디오니시오 미세로니의 후기 작업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그는 오타비오 미세로니(1567-1624)의 아들로서 가업을 이어 프라하 궁정에서 일했다.

 

 

 

16. <조가비 모양 그릇>

17세기 전반, 산호석회암, 은, 도금

: 산호석회암은 16세기 과학에 관심이 있는 인문학자와 귀족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수집품 중 하나였다. 이 그릇을 제작한 석공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용하던 산호석회암을 선택해서 마치 자연스럽게 주름이 진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했다. 석회암의 생김새에서 "별 무늬 돌(star stone)"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루돌프 2세(1552-1612)도 이 "별 무늬 돌"을 7점 소장했다고 한다.

 

 

 

17. <요새 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풍경>

조반니 카스트루치 추정(1598-1615년 추정)

17세기 전반, 마노, 벽옥

: 멀리 산맥이 있고 가운데에는 우뚝 솟은 탑이 있는 성과 다리가 보인다. 보석류 석판을 형태에 맞게 깎아서 조립한 것으로 '보석 모자이크'라고 부른다. 조반니 카스트루치는 1610년 루돌프 2세 황제의 황실 석공이었다. 아버지 코지모 카스트루치는 피렌체 출신 장인으로 프라하로 이주해 '보석 모자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설립했다.

 

 

 

 

18. <십자가 모양 해시계>

1619년, 구리 합금에 도금

: 해시계는 근대 초기까지 시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기계식 시계처럼 오작동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해시계는 여러 방법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다면 십자가 구조로 제작되었다. 해시계에 집약된 다양한 방법의 시간 측정법은 제작자의 수학, 기하학,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루돌프 2세 황제가 선호한 예술품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루돌프 2세는 특유의 내성적인 성격으로 프라하의 왕성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자신의 끝없는 지식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일생 동안 수많은 분야의 학문을 탐독했다.

그의 말년은 고독했지만, 우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그의 열정은 과연 보상을 받았을까.

그 답은 진기한 수집품으로 가득한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의 '루돌프 2세의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

 

 

 

19.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이야기가 있는 접시>

16세기 전반, 은에 금도금

: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유행했던 형식의 접시로, 세 개의 동심원 안을 부조로 꾸몄다. 가장 바깥쪽에는 아시리아에게 포위당한 유대 도시 베툴리아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구약성서에서 신앙이 깊으며 남편을 잃은 여인 유디트는 자신의 고향을 지키려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뒤, 목을 잘라 도시를 구한다. 가장 안쪽 원에는 재판 받는 벌거벗은 남자, 광야, 세례와 천사, 옷을 받는 수도승이 묘사되어 있는데 어던 이야기인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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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의 궁정 화가들】

: 스페인 왕실에서 유년기를 보낸 루돌프 2세는 정치, 종교보다 예술,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황제가 된 후에도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많은 화가를 프라하 황실로 불러들였습니다. 엄격한 가톨릭 교리 아래에서 성장한 루돌프 2세에게 인체의 비율을 비틀어 표현하는 매너리즘의 화법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 속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은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을 선호했습니다.

루돌프 2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 요제프 하인츠 1세, 한스 폰 아헨 등을 궁정 화가로 삼았습니다. 꽃 정물화와 풍경화로 유명했던 룰란트 사베리 역시 루돌프 2세의 궁정 화가였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으로 티롤 지역을 방문해 다양한 풍경을 관찰했고 그를 토대로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20. <주피터와 칼리스토>

요제프 하인츠 1세(1564-1609)

1603년 이후, 동판에 유화

: 주피터는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로 변장하여, 다이아나를 따르며 순결서약을 한 님프 칼리스토를 속이고 있다. 주피터의 등 뒤로 보이는 분홍색 천은 그가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흔적이다. 주피터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칼리스토는 주피터의 포옹을 거부하고 있다. 요제프 하인츠 1세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였다. 길어진 신체 비례는 일반적인 매너리즘 화풍의 특징이다.

 

 

 

21. <머큐리의 경고를 받는 비너스와 마스>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1546-1611)

1586-87년경, 캔버스에 유화

: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주로 남편인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가 아닌 다른 남성과 함께 그려지곤 한다. 이 그림에서는 전쟁의 신 마스와 등장한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쓴 머큐리는 훈계하듯 손가락을 들어 올려 간통하지 말라는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는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화가이다. 매너리즘의 특징인 길어진 신체 비례와 모호한 자세 등이 나타난다.

 

 

 

2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전쟁 선포>

한스 폰 아헨(1552-1615)

1603-04년경, 종이 또는 양피지에 유화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경으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는 언월도를 들고 있다. 반대편에는 신성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신이 헝가리 전통 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차고 있다. 뒤에는 사자 가죽을 두르고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서 있다. 이 작품은 루돌프 2세 황제(1552-1612) 재위기에 있었던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23. <벌목꾼이 있는 산 풍경>

룰란트 사베리(1576-1639)

1606-07년, 동판에 유화

: 나무가 자라는 바위와 벌목꾼 등 사실적으로 묘사한 요소들을 조합하여 연출했다. 룰란트 사베리는 얀 브뤼헐 1세(1568-1625)와 동시대 화가로 풍경화, 꽃 정물화에 뛰어났다. 그는 루돌프 2세(1552-1612)의 궁정 화가로 일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티롤 지역의 자연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화가의 시선으로 세밀한 부분을 예리하게 포착한 산 풍경은 그가 티롤을 여행하며 받은 인상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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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박물관을 꾸미다,

티롤의 암브라스 성】

: 남다른 수집벽으로 유명한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수집가입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 세습 영지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상속할 때 오스트리아 서쪽 지역인 티롤 지역을 물려받아 1564년부터 159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그는 갑옷, 무기, 회화, 온갖 이국적인 소재의 공예품 등 폭넓은 범위의 예술품을 대량 수집했고, 암브라스 성 내에 수집품을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현재까지도 16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 공간은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이 직접 진열장을 설계하고 전시품의 위치를 지정했습니다. 전시할 수집품의 재질과 성격에 따라 진열장의 소재와 벽 색깔까지 대공이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24. <페르디난트 2세 대공>

16세기 후반, 캔버스에 유화

: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든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목에 건 대공을 둘러싼 화환은 티롤 통치권자의 권위를 강조한다. 대공은 종교 대립이 심했던 티롤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다양한 종파가 자리잡고 예술이 발달하면서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티롤에 유입됐고 이는 그의 수집품에 반영되어 암브라스 성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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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티롤】

: 티롤은 대대로 합스부르크의 대공들이 다스린 지역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연결하는 곳에 있으면서 이탈리아와도 접하고 있어 로마제국 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이 지역도 16세기 종교 분쟁을 피할 수 없었는데,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다른 합스부르크 사람들과 달리 종교에 온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결과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화적으로 르네상스가 꽃피게 됩니다.

25.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프란스 라위크스(1604-1668)

1648년경, 캔버스에 유화

: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프랑스식 옷차림을 한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1628-1662)의 모습은 그가 패션에 민감하고 허영심이 많았음을 드러낸다. 의복을 장식하는 리본과 나비모양 매듭은, '갈랑'이라 불리던 프랑스 패션의 요소로, 17세기 중엽 유럽에서 유행했다. 작품을 그린 프란스 라위크스는 루벤스(1557-1640)에게 훈련을 받은 후 티롤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26. <야자열매 잔>

16세기 후반 또는 17세기 전반, 야자열매, 은, 도금

: 17세기로의 전환기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항해사들과 상인들은 외국에서 온갖 이국적인 물건들을 들여왔다. 낯선 물건에 값비싼 부속을 장식해서 만든 공예품들은 유럽의 예술 애호가들과 수집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럽인은 야자열매를 해독제와 치료제로 여겼기 때문에 야자열매를 잔으로 변형시킨 작품이 드물지 않게 제작됐다. 뚜껑에는 '란츠크네히트'라고 부르는 16세기 용병 복장을 한 작은 인물상이 있다.

 

 

 

27. <야자열매 주전자>

16세기 후반, 야자열매, 은, 도금

: 16세기 유럽에 야자열매는 바다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라고 알려지면서 낯설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여겨졌다. 인도로 떠난 유럽인들은 항해 도중 야자열매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전자를 장식한 물고기 모양 물의 정령은 야자열매가 바다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또 야자열매가 해독 성분을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다.

 

 

28. <성(聖) 히에로니무스>

페루지노(피에트로 바누치, 1446-1523)

1502년경, 패널에 유화

: 성 히에로니무스는 십자가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다. 그는 돌로 가슴을 치며 고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품에서도 오른손에 돌을 움켜쥐고 있다. 사자는 히에로니무스가 고행을 할 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준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성인 옆 빨간 추기경 모자는 그가 추기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라파엘로의 스승인 페루지노는 로마,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화가로, 참회하는 히에로니무스의 모습을 이탈리아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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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라스 성과 합스부르크】

: 티롤 지역은 막시밀리안 1세가 통치하던 15세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는 왕궁에 거주하며 티롤을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티롤은 지금도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남아 있고, 현재의 지명은 인스브루크입니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무너진 성을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조하여 암브라스 성으로 건축했고 이후 대공의 가족들이 거주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 티롤은 합스부르크가 다스렸는데 역대 영주들의 초상이 암브라스 성 내 스페인 홀에 남아 있습니다.

<1648년의 암브라스 성 배치도>

 

 

29. <우물가의 리브가와 엘리에셀>

오타비오 바니니(1585-1643년경)

1625-26년경, 캔버스에 유화

: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시종 엘리에셀을 라반에게 보낸다. 그는 우물가에 멈춰 서서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여성이 신이 신부로 정한 사람임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작가는 리브가가 낙타에게 먹일 물을 엘리에셀에게 주는 순간을 그렸다. 17세기 피렌체에서 활동한 화가 오타비오 바니니는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와 강렬한 색채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30. <성(聖) 가족>

안젤로 솔리메나(1629-1716)

17세기 중엽, 캔버스에 유화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사이의 애정 어린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요셉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배경에는 양과 소, 당나귀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안젤로 솔리메나는 주인공들 사이의 안정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원형 틀 안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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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 후원】

: 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에는 독일 출신 화가 율리우스 빅토르 베르거가 1892년에 그린 길이 17m, 폭 6m의 거대한 천장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예술 후원자였던 왕가의 사람들과 당대 교류한 예술가, 학자 등 총 44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탄생한 문화유산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겨졌고 이제 시공간을 넘어 우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부터 카를 6세까지 약 200년에 이르는 왕가와 예술가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약 5-6분 가량의 영상의 일부입니다.

미디어아트 영상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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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 17세기에는 역동적이고 극적인 표현이 특징인 바로크 미술 양식이 발달했고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지역 등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특히 상업의 중심지로 거듭난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부유함을 과시하기 위해 집 안을 장식하는 다양한 장르의 회화가 발달했습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브뤼셀에 부임했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17세기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의 수준 높은 회화를 수집했고, 말년에 수집품과 함께 빈으로 귀환했습니다.

카를 5세를 시작으로 약 200년간 이어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수집한 예술품도 카를 6세에 의해 18세기 초 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게 유럽을 빛낸 거장의 명화들은 수도 빈으로 모였고 현재 빈미술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 카를 5세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모든 영토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했습니다. 결국 카를 5세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을 다스리는 계열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는 계열로 나뉘었습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1700년까지 5대에 걸쳐 약 200년간 이어졌습니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전성기를 누린 펠리페 2세에 이어, 펠리페 4세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쇠퇴했으나 문화적으로는 번성하여 예술의 부흥기를 열었습니다.

 

 

 

31. <카를 5세가 있는 메달>

1535-40년경, 금, 흑요석, 나무

: 카를 5세(1500-1558)가 1535년 튀니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메달이다. 월계관을 쓴 황제는 고전주의풍의 가슴갑옷을 입고 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다. 황제 주위로는 카를 5세를 아프리카 황제로서 축하한다는 의미의 "CAROLV[S] V IMP AVC AFRICANVS" 문구가 새겨져 있다. 메달 제작자는 메달 거푸집 1세트로 같은 모양의 메달을 많이 만들어 전쟁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수여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1521년 카를 5세는 다음과 같은 공식 칭호로 불렸다.

카를,

신의 은총으로 선출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제국의 영원한 영토 확장자,

독일,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양(兩)시칠리아, 예루살렘, 헝가리,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발레아레스 제도,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하엔, 알가르브, 알해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제도,

동인도 제도와 서인도 제도, 대서양의 본토 등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부르고뉴, 로트링겐, 브라반트,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림뷔르흐, 룩셈부르크, 헬데를란트,

뷔르템베르크, 칼라브리아, 아테네, 네오파트리아스 등의 공작

마틴 레디,『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中

 

 

32.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1631-32년, 캔버스에 유화

: 이 초상은 펠리페 4세(1605-1665)의 첫 번째 왕비인 엘리자베트(1602-1644)의 초상화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펠리페 4세는 왼손에 장갑을 끼고 다른 쪽 장갑을 손에 쥔 채 검 손잡이 위에 왼손을 걸치고 있다. 장갑을 벗은 오른손은 종이를 쥐고 있다. 15-17세기 남성이 즐겨입던 더블릿을 입고 있으며 소매에만 검은색과 흰색 문양의 장식이 있다. 목에는 검은색 리본의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었다.

 

 

 

33.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1631-32년, 캔버스에 유화

: 펠리페 4세(1605-1665)의 첫 번째 왕비인 엘리자베트(1602-1644)는 프랑스 왕 앙리 4세(1553-1610)와 마리 데 메디치(1575-1642)사이에서 태어났다. 펠리페 4세의 초상화와 짝을 이루려고 왕을 향해 살짝 몸을 돌린 모습으로 그렸다. 왕비는 초상화 그리는 것을 즐기지 않아 딱 한 번 포즈를 잡아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에 그려가는 수많은 초상화는 그 모습을 따른 것이다.

 

 

34.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1605-1665)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1634-1696)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의 공주를 보고 싶어 하던 페르디난트 3세(1608-1657)를 위해 그린 초상화이다. 공주는 훗날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1640-1705)와 결혼하게 된다. 두께와 농도를 달리한 붓질로 소매와 드레스의 질감을 생동감 있고 정교하게 만드는 벨라스케스 특유의 화법이 잘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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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빌헬름의 화랑】

: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빈미술사박물관 회화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 수집가입니다. 그는 1647년부터 1656년까지 9년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으면서 브뤼셀에서 활발한 수집 활동을 했습니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안목이 뛰어났던 대공은 궁정 화가, 동료 수집가와 함께 평생 1,400여 점이 넘는 회화를 수집했습니다. 빌헬름 대공은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에 관심이 많았고, 그가 머물던 플랑드르 지역에서 장르별로 17세기 최고의 명화를 모았습니다. 단지 수집품 수량만 많았던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명화가 다수 포함되어 합스부르크 왕가 수집품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35.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얀 판 덴 후커(1611-1651)

1642년경, 캔버스에 유화

: 레오폴트 빌헬름(1614-1662)은 성공한 지휘관의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지휘봉을 쥐고, 왼손을 허리에 올려 자신만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2세(1578-1637)의 막내아들인 빌헬름은 30년 전쟁 시기 독일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1646년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검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은 야전 사령관으로 일생을 보낸 대공의 인생을 암시하는 것 같다.

 

 

 

36. <페르디난트 3세>

얀 판 덴 후커(1611-1651)

1643년경, 캔버스에 유화

: 페르디난트 3세(1608-1657)는 페르디난트 2세(1578-1637)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1574-1616)의 세 번째 아들이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페르디난트 3세는 합스부르크 군주 가운데 처음으로 작곡을 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어로 시를 쓰기도 했는데, 따라 부르기 쉬워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하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30년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이루게 된다.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브뤼셀 화랑>

다비드 테니르스 2세

1651년, 빈미술사박물관

: 모자를 쓴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과 그의 궁정 화가 다비드 테니르스 2세를 중심으로 당시 구입한 51점의 이탈리아 회화를 둘러보는 장면을 그렸다. 제일 위의 왼쪽에서 두번째 그림이 이번 전시에 출품된 베로네세의 <동방박사의 경배>이다.

 

 

 

37. <동방박사의 경배>

베로네세(파올로 칼리아리, 1528-1588)

1580-88년, 캔버스에 유화

: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나이 든 왕을 축복한다. 왕의 오른편으로는 터번을 쓰고 코트를 입은 무어인 왕이 금 그릇을 손에 들고 아기 예수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성모 뒤에 있는 요셉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인기가 많았던 주제로, 동양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38. <갑옷을 입은 남자>

틴토레토(자코포 로부스티, 1519-1594)

1553년, 캔버스에 유화

: 창밖 바다에 떠 있는 빨간 군함으로 보아 턱수염을 기른 초상화의 주인공은 공화국 해군에 복무하며 해상 원정에서 부를 쌓으려고 했던 베네치아 귀족이었던 것 같다. 허리에 손을 올린 당당한 자세와 눈빛에서 자신감이 엿보인다. 틴토레토는 인물이 입고 있는 갑옷의 우아한 금장식 하나하나의 반짝이는 반사 광을 세심히 포착해냈다. 이것은 베네치아 화파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39.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

베로네세(파올로 칼리아리, 1528-1588)

1580-88년경, 캔버스에 유화

: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그렸다. 이브는 아벨로 추정되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고 아담은 샘에서 물을 뜨고 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초록색과 갈색으로 물든 전원 풍경은 이들에게 다가올 재앙을 암시한다. 베로네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배네치아 화가로, 베네치아의 '산 자코모 델라 주데카 성당'에서 이 작품을 주문해 제작했다.

 

 

 

40. <산 풍경>

요스 데 몸퍼르 2세(1564-1635)

1620년대, 캔버스에 유화

: 화가는 전경, 중경, 원경을 구분하여 감상자의 시선이 그림의 아래에서 시작해 가운대의 회색 봉우리를 지나 먼 곳에 있는 계곡으로 향하게 한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요스 데 몸퍼르 2세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화가로 풍경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이 작품은 스위스의 생고타르 고개를 묘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화가가 1580년대 스위스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41. <폭포가 있는 풍경>

야코프 폰 루이스달(1628-1682)

1670년-80년경, 캔버스에 유화

: 중경에는 칠흑 같은 숲이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커다란 침엽수가 서 있다. 폭포의 흰 물거품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야코프 폰 루이스달은 17세기 플랑드르 출신 풍경 화가이다. 하늘을 넓게 그린 시원한 구도의 풍경화로 유명했고 감정을 담은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려 훗날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에 영향을 미쳤다.

 

 

 

42. <야코모 데 카시오핀>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1634년경, 캔버스에 유화

: 야코모 데 카시오핀(1575-1642)은 안트베르펜 출신의 예술 애호가이자 수집가로, 이 초상화를 그린 안토니 반 다이크와 가까운 친구였다. 반 다이크는 그의 내성적인 성향을 잘 표현했다. 초상화로 유명했던 플랑드르 화가 반 다이크는 1596년부터 1621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섭정한 알브레히트 7세 대공(1559-1621)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1566-1633)부부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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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거장, 루벤스】

: 루벤스는 강렬한 명암 대조와 역동적인 구도로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한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입니다. 그는 1609년에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된 알브레히트 7세 대공의 궁정 화가로 일하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어떤 주제라도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생생한 작품으로 만드는 루벤스 특유의 화풍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공방을 운영하며 효율적인 분업 체계를 만들었고 이로써 전 유럽에서 쇄도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각국의 외교 사절 역할도 겸했던 루벤스는 유럽을 통틀어 독보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후대의 많은 화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3.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

1625-28년경, 패널에 유화

: 이탈리아 시인 로도비코 아리오스토(Lodovico Ariosto, 1474-1533)의 『광란의 오를란도(1516)』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공주가 은둔자의 구애를 계속해서 거절하자, 은둔자는 그녀에게 약을 먹여 접근한다. 루벤스는 은둔자가 잠든 공주에게 다가가는 순간을 포착해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공주 뒤로 보이는 악령의 표정은 관람자의 감정을 대변한다. 이야기의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내는 화가의 재치가 엿보인다.

 

 

 

44.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

1620-25년경, 캔버스에 유화

: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은 프리기아라는 마을을 방문한다.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유일하게 이 늙은 부부만이 그들을 성심성의껏 대접했다. 화가는 노인이 손님에게 대접한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아 이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을 그렸다. 붉은 옷을 입은 머큐리를 마주보는 필레몬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고, 주피터는 손을 들어 단 한 마리 남은 거위마저 잡으려는 바우키스를 저지하고 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공방을 열고 장르별 대표 화가들과 협업했는데, 이 작품의 정물과 동물은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스네이데르스(1579-1657)가 그렸다.

 

 

 

 


 

 

 

 

 

 


 

 

 

45. <기름 부음을 받는 솔로몬>

코르넬리스 데 포스(1584-1651)

163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그렸다. 기름 부음은 왕위 계승 의식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화려한 대야 위로 몸을 숙이고 그 뒤로 어린 시종 두 명이 왕실의 상징인 홀(笏)과 왕관을 놓은 베개를 들고 서 있다. 뒤로 보이는 나선형 기둥은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솔로몬 기둥을 연상시키며, 기름 부음의 주인공이 솔로몬임을 나타낸다.

 

 

46. <바람난 신부를 둔 신랑>

얀 스테인(1626-1679)

1670년경, 캔버스에 유화

: 한 여관에서 열린 왁자지껄한 결혼식 피로연 장면이다. 나이 많은 신랑은 지푸라기 몇 가닥만 꽂은 모자를 쓰고 있다. 볼록한 신부의 배에 손을 올린 아이가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어 신랑이 바람난 신부에게 속았음을 알 수 있다. 플랑드르에서는 교훈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풍속화가 그려졌는데 얀 스테인은 대표적인 풍속 화가였다. 이 그림은 부부의 정절을 지키고 간통을 삼가라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47. <이집트로 피난 중 휴식>

얀 브뤼헐 1세(1568-1625)

1595년경, 동판에 유화

: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는 도중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다. 천사는 그들의 여정이 신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숲 풍경화는 주로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의 배경으로 그려졌다. 숲을 배경으로 아기 예수 가족이 쉬어가는 장면은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이 작품에서 얀 브뤼헐 1세는 풍경을, 한스 로텐함머(1564-1625)는 인물을 그렸다.

 

 

 

48.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얀 브뤼헐 2세(1601-1678)

1626년 이후, 패널에 유화

: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수풀과 꽃은 꽃 정물에 뛰어났던 얀 브뤼헐 2세의 화법을 보여준다. 유명한 플랑드르의 화가 가문의 전통을 잇는 얀 브뤼헐 2세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때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의 궁정 화가였던 다비드 테니르스 2세(1610-1690)의 소개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작품 의뢰를 받으며 부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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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헐 가문과 꽃 정물화】

:플랑드르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 1세는 소작농과 전원의 삶을 그린 풍경화로 브뤼헐 화가 가문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둘째 아들 얀 브뤼헐 1세는 아버지의 명성을 잘 이어간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특히 정물화를 잘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꽃다발 정물이 가장 유명해 '꽃의 브뤼헐'이라고도 불렸습니다.

17세기 플랑드르에서 독립적인 장르로 발달한 꽃 정물화는 하나의 꽃병에 각기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을 모아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꽃다발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꽃병 아래 떨어진 시든 꽃잎과 곤충 등은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생명의 유한함을 상징합니다.

전시되는 동안 꽃은 계속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49. <화환 속 남자>

얀 리벤스(1607-1674), 얀 판 덴 헤케(1620-1684)

1642-44년, 패널에 유화

: 미소를 띤 젊은 남성이 화환에 둘러싸여 있다. 화환은 튤립, 수선화, 카네이션, 장미, 한련, 물망초, 히아신스, 아네모네, 은방울꽃, 나팔꽃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꽃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이 같은 화환 속 초상화는 안트베르펜 지역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은 얀 리벤스는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였다.

 

 

 

50. <꽃다발을 꽂은 파란 꽃병>

얀 브뤼헐 1세(1564-1625)

1608년경, 패널에 유화

: 검은 붓꽃은 정물화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 꽃이지만, 얀 브뤼헐 1세는 꽃 정물화에 종종 이 검은 붓꽃을 그렸다. 바닥에 떨어진 무당벌레, 메뚜기, 파리, 헤어즐넛, 떨어진 꽃잎은 '눈속임(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려 실제로 눈앞에 있는 듯 느낌을 준다. 떨어진 꽃잎은 화려한 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든다는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꽃병은 중국 명대 청화백자로, 동물 머리 모양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51. <꽃다발>

얀 판 덴 헤케(1620-1684)

1652년, 캔버스에 유화

: 창문 앞 난간에 놓인 유리병에는 튤립, 카네이션, 수선화, 팬지, 재스민으로 가득하다. 오른쪽 벽은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어 왼편의 도시 너머 평야로 관람객의 시선이 향하게 한다. 꽃병 뒤로 보이는 도시 그레벨링겐 성벽으로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튤립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 아름다운 허상을 의미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공격받는 도시가 아닌 화려한 꽃다발에 머물게 하고 있다.

 

 

 

52. <꽃다발>

얀 판 덴 헤케(1620-1684)

165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노란 오스트리아 들장미를 중심으로 청백색 나팔꽃은 화면 왼쪽에서 색감을 뽐낸다. 하얀 백합은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그 옆으로 주홍빛 깍지콩꽃은 꽃다발의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불꽃무늬 튤립이 꽃다발의 전체적인 균형을 맞춘다. 화가는 얀 브뤼헐 1세(1564-1625)가 유행시킨 꽃다발 정물을 변형하여 풍성함은 적지만 세련되어 보이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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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만테냐, <승리> 연작의 구성】

 

53-61. <승리> 연작

안드레아 만테냐(1431-1506)의 제자로 추정

1598년 이전, 종이에 과슈, 캔버스에 래미네이트

: 현재 햄프턴 궁전에 소장돼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가 그린 <승리> 연작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이다. 카이사로(기원전100-44)가 기원전 46년 갈리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장면을 묘사했다. 만테냐의 그림을 판화로 옮긴 작품들은 만테냐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VENI 왔노라

VIDI 보았노라

VICI 이겼노라

 

 

62. <성(聖) 세바스티안>

알브레히트 폰 호른(1581년경-1665)

1634-35년경, 은, 도금, 나무

: 고대 로마 황제의 근위대장인 성 세바스티안은 기독교 신자들을 몰래 도왔다. 이를 알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4-311)는 사형 선고를 내리지만 그는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 선고에서 세바스티안은 순교했다. 작품은 세바스티안이 첫 번째 사형 선고로 나무에 묶여 화살을 맞는 장면을 묘사했다. 비록 몸에는 화살이 꽂혔지만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전염병을 막는 수호성인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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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층의 전유물, 사냥】

: 사냥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고급 취미로, 귀족들과 더불어 신흥 부르주아 계층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부유함과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냥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대부분 집을 장식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사슴 사냥은 귀족 이상의 신분에게만 허가된 특권이었지만 새 사냥은 부르주아 계층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새 사냥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층이 주문한 것이었습니다.

63. <표범과 독수리>

필리프 페르디난트 데 해밀턴(1667년경-1750)

1722년, 캔버스에 유화

: 대머리 독수리가 표범이 갓 잡은 흰 닭을 낚아채기 위해 접근하고 있다. 표범은 고개를 뒤로 돌려 대머리 독수리를 노려본다. 목가적 풍경을 배경으로 펼쳐진 극적인 대립 구도는 관람자가 다음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화가는 카를 6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고 황실 기록에 남아 있다. 화가는 작품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정 화가'라는 뜻의 "S. C. M. C. P."라는 머리글자를 남겼다.

 

 

 

64. <사냥한 동물과 개>

프란츠 베르너 탐(1658-1724)

1706년, 캔버스에 유화

: 독일 출신 화가 프란츠 베르너 탐이 그린 정물화의 주된 특징은 시원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조를 사용하고, 빛의 효과를 세밀하게 사용함으로써 동식물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이다. 특히 사냥 주제의 정물화에는 지평선을 낮게 배치하여 관람자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탐이 그린 사냥, 꽃, 과일 주제의 정물화는 특유의 장식적인 표현으로 오스트리아 황실과 보헤미아 귀족 궁전에서 인기가 많았다.

 

 

 

65. <사냥한 개와 죽은 자고새>

얀 페이트(1611-1661)

1647년 추정, 캔버스에 유화

: 나무 아래 죽은 새와 사냥개 한 마리가 있다. 왼편 숲 너머로 대성당의 높은 탑과 더불어 화가의 고향인 얀트베르펜 도시가 배경으로 그려졌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야생동물 그림은 정물화에서 특히 중요했던 장르로, 부유한 계급이 집안을 장식할 목적으로 주문해 수요가 높았다. 얀 페이트는 이 분야에서 가장 이름을 알렸던 프란스 스네이데르스(1579-1657)의 제자였다.

 

 

 

66. <사냥한 새>

얀 페이트(1611-1661)

1641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 버들로 엮어 만든 바구니와 새장 주변에 죽은 새를 배열하고 여러 사냥 도구를 배치했다. 메추리, 자고새, 피리새, 오색방울새, 되새, 푸른박새, 종달새 등 다양한 종류의 새가 등장한다. 화가는 특유의 붓질로 깃털의 질감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17세기 귀족 사이에 유행하며 귀족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새 사냥은 부르주아 신흥세력에게도 퍼지며 더 유행했다.

 

 

 

67. <사냥 도구>

요하네스 레이만스(1633-1688) 계열

1660년경, 캔버스에 유화

: 그림은 매 사냥과 연관된 도구가 벽에 실제로 걸린 것처럼 묘사했다. 화면 하단에 길게 놓인 총이 있고, 작은 새장과 모자, 미끼를 넣는 주머니, 호루라기 등이 보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린 '트롱프뢰유', 즉 눈속임 기법의 그림은 17세기 중엽 정물화의 하위 장르로 발전했다. 눈속임 정물화는 작품이 걸릴 장소의 빛의 방향까지 고려해 주문 되었을 정도로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주된 특징으로 했다.

 

 

 

68. <아침 식사>

코르넬리스 데 헤엠(1631-1695)

1660-69년, 패널에 유화

: 레몬, 포도, 자두 등 하루 중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가벼운 음식을 묘사한 그림이다. 테이블 밖으로 튀어나온 칼과 껍질을 벗긴 레몬은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주로 쓰이던 소재였다. 리본과 자두의 짙은 파란색을 쓴 대담한 색채 구성과 작은 크기의 작품으로 그린 것은 코르넬리스 데 헤엠 특유의 특징이다. 세련된 색 변화와 사실적인 빛 효과는 화가의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69. <제철소와 도둑이 있는 산 풍경>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1535년경-1597)

1585년경 추정, 캔버스에 유화

: 짐꾼이 자신을 따라오는 강도들을 피해 공포에 질려 입을 벌린 채 달려오고 있다. 섬에는 용광로가 있는 제철소가 보인다. 벨기에 출신 화가 팔켄보르흐는 높이 솟은 산맥과 제철소, 정착촌을 조화롭게 배치했고, 용광로, 물레방아 등의 구조물로 제철 과정을 면밀히 묘사했다. 16세기 후반 알프스 산맥 근방에서 제철소 약 1,200개소를 운영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 풍속을 반영한 풍경화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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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 18세기 카를 6세 황제의 시대, 내정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카를 6세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카를 6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1740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맙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기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서야 그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힘들게 왕의 자리에 오른 만큼,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내적으로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왕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녀가 머물던 쇤브룬 궁전도 수수한 양식으로 개조하고 진흙에서 추출한 노란색 안료로 벽을 칠해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고, 아들 요제프 2세 때 벨베데레 궁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며 그 뜻을 이루게 됩니다.

70.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렬>

구스타프 아돌프 뮐러(1864-1937)

1740년, 동판화

: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1685-1740)황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이 된다. 1740년 11월 20일 새로운 왕에게 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빈 시내 호프부르크 궁에서 성 슈테판 대성당까지 이어졌다. 고위직 관료들이 앞장서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차가 뒤따른다. 빈 마차는 서거한 카를 6세에 대한 추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71. <마리아 테레지아>

마르틴 판 메이텐스 2세(1695-1770)

1745-50년경, 캔버스에 유화

: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한다. 세 군주국의 위엄은 탁자 위에 올려둔 왕관으로 드러난다.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차례로 놓여 있다. 여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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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한 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1745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프란츠 1세는 정치에 큰 뜻이 없어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운영하며 실권을 가졌습니다.

1765년 갑작스러운 프란츠 1세의 사망으로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합니다.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 왕과 요제프 2세 황제의 독특한 공동 통치가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급진적이었던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은 결국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72. <요제프 2세>

요제프 히켈(1736-1805)

1785년경, 캔버스에 유화

: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아들인 요제프 2세(1741-1790)는 아버지의 황위를 물려받아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 서재를 배경으로 한 모습은 요제프 2세가 '일하는 황제'로 묘사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도와 지구본은 신지식을 섭렵한 군주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황실 휘장이 없어, 그가 허례허식 없는 황제로서 오스트리아 국민 앞에 서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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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

: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으로 유학 온 프랑스 로트링겐 가문의 9살 연상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다.

카를 6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고, 1736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65년, 아들 레오폴트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프란츠 슈테판은 갑작스럽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프란츠 슈테판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어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을 애도했다.

73. <마리아 테레지아와 평화의 여신상>

안톤 폰 마론(1733-1808)

1772년, 캔버스에 유화 스케치

: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의 대형 초상화를 위해 그린 스케치다. 1765년 남편 프란츠 1세(1708-1765)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검은색 상복 차림으로 지냈을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는 모습은 이전에 그려진 강하고 아름다운 군주의 초상과는 다르다. 뒤편에는 날개 달린 아기천사와 함께 있는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조각상이 있다.

 

 

74.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1723-1786년경)

1773년, 캔버스에 유화

: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1742-1798)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1738-1822)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後日)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미디어아트 일부

 

 

 

 

75.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1755-1842)

1778년, 캔버스에 유화

: 마리 앙투아네트로 잘 알려진 마리아 안토니아(1755-1793)는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왕비는 실크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76-81)

76-79. <잔 세트>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1713-1779)

1750년경, 금, 자기, 나무

: 총 70여 점으로 구성된 아침 식사용 식기와 세면도구 일부로,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됐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침 의례 때 실제로 사용한 용구는 차, 커피, 핫초콜릿을 마시는 데 사용된 각기 다른 종류의 주전자와 그에 맞는 마이센 자기 잔, 설탕 그릇, 숟가락 등이 있다. 이 작품은 녹인 초콜릿을 마시는 데 사용한 잔 세트이다.

80-81. <세면도구>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1713-1779)

1750년경, 금, 자기, 나무

: 총 70여 점으로 구성된 아침 식사용 식기와 세면도구 일부로, 순도 높은 금으로 제작됐다. 면도용 칼, 거울, 촛대, 대야, 물주전자는 면도 세트로 프란츠 1세(1708-1765)의 것이다. 금으로 만든 세면도구 세트는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물건으로, 이를 증명하듯 닳거나 흠이 난 것이 거의 없다.

 

 

(82-83)

82.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는 함>

18세기 중반, 달팽이 껍데기, 금

: 갈고둥 껍데기로 만든 함으로, 껍데기를 깎아 타원형 뚜껑을 만들어 열고 닫을 수 있게 경첩과 물결 모양 금장식을 붙였다. 뚜껑에는 프란츠 1세(1708-1765)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의 부부 초상을 새겼다. 가슴갑옷과 망토를 입은 황제는 황금양모 기사단 목걸이와 월계관을 썼고 황후는 작은 왕관을 썼다. 조개껍데기와 달팽이를 소재로 한 공예품은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큰 인기를 끌었다.

83. <셔벗용 식탁 장식>

1736-40년, 조가비, 달팽이 껍데기, 금

: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으로, 손잡이 기둥에 달린 여섯 개의 고리에는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벗 그릇이 달려있다. 고리 끝의 장식에는 여성 초상 4점과 남성 초상 2점이 옆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황제 부부와 테레지아를 포함한 세 딸, 그리고 사위 프란츠 슈테판의 초상화이다. 셔벗 그릇 위에 달린 초상 부조 장식은 초상 인물이 셔벗을 먹을 때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셔벗 그릇은 입술을 금테로 둘렀고 바닥은 잎과 띠무늬, 그리고 흉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84.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있는 술잔>

요한 안드레아스 텔로트(1655-1734)

1679-83년, 부분 은도금,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다이아몬드

: 잔에는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장식되어 있다. 잔 몸통에 장식된 세 개의 원형 창에는 다프네에게 구애하는 아폴로, 다프네를 따라가는 아폴로, 그리고 월계수로 변신하는 다프네가 묘사되어 있다. 뚜껑에는 아폴로가 짝사랑하기 전에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즉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피톤을 격파하는 아폴로, 큐피드를 놀리는 아폴로, 아폴로에게 황금 화살을 쏘는 큐피드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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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앙숙, 프란츠 2세와 나폴레옹】

: 1792년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을 때, 유럽 전역은 프랑스 대혁명(1789)의 영향으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이후 숙적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프란츠 2세의 치세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전쟁은 무려 7차까지 이어졌고, 오스트리아는 연이은 패배로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겼습니다. 더구나 프란츠 2세는 딸마저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하게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고 라인 지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프란츠 2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영방을 결집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한 후 프란츠 1세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후 1806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합니다.

85. <성(聖) 안드레아>

카밀로 루스코니(1658-1728)

1705-10년경, 청동

: 성 안드레아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다. 그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고도 부른다.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1649-1721)는 로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중앙통로 벽감에 안치하기 위해 대형 사도 조각상 12점을 주문한다. 이 작품은 실제 대리석 조각으로 작업하기 전 제작한 축소판 모형 중 하나이다.

 

 

 

86.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

요한 조파니(1733-1810)

1775년, 캔버스에 유화

: 프란츠 대공(1768-1835)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주문해서 그린 초상화이다.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고 있다. 책이 쌓인 탁자에 손을 올린 자세는 그가 후계자로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대공 뒤 의자에 놓인 삼각모와 흉갑은 기사도적 용기와 고결함을 상징한다.

 

 

 

87.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

제작: 야코프 괴벨스 1세(?-1605 이전)

1600년경, 양모, 실크

: 이 작품은 사도 바울이 선교를 위해 아테네에 머물렀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법 평의회 중 광장에서 양팔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에는 불멸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513년 영혼불멸에 관한 칙령을 내린 교황 레오 10세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 중 하나로 프란츠 2세가 1804년 나폴리 왕비로부터 매입하여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88. <기적의 물고기 잡이>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

제작: 야코프 괴벨스 1세(?-1605 이전)

1600년경, 양모, 실크

: 이 작품은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시몬 안드레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안드레는 팔을 저으며 풍성한 수확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적을 체험한 후 어부들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된다. 이 기적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베드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89. <나폴레옹 1세>

안드레아 아피아니(1754-1817)

1805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 나폴레옹은 녹색 테두리의 오렌지색 현장(懸章)을 두르고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북부 이탈리아 치살피나 공화국의 지방총독이었고, 1805년 자신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승급시켰다. 이 작품은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아 아피아니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1805년 나폴레옹의 제1 궁정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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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태피스트리 연작】

: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남은 10점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을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 판 앨스트가 태피스트리를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m였고 모두 합친 총 길이가 42m일 정도로 장대했습니다. 그 중 7점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설치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 받았습니다. 교황은 판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베드로의 삶 5점 / 사도 바울의 삶 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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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을 집대성하다, 빈미술사박물관】

: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48년부터 68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렸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민족주의가 급부상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시대를 열어 대외적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한편 1857년에는 수도 빈의 도시 확장 프로젝트를 명령하여 장장 30년간 도시 빈을 현대화했습니다.

도시 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너비 57m, 길이 5km에 이르는 반지 모양의 도로인 링슈트라세(Ringstrasse)를 만듭니다. 도로를 따라 도시 빈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물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빈미술사박물관입니다.

90.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제복>

안톤 우첼 & 존

1907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군대는 독일 군복과 헝가리 군복을 모두 입을 수 있었다. 이 제복은 헝가리식 제복으로 밝은 회청색 재킷은 기병대의 금몰 장식으로 여미게 되어 있다. 금색 자수로 아칸서스 잎 무늬 계급장을 장식한 옷 소매는 빨간색 깃 장식과 함께 화려함을 더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중 제국 시기 육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육군 원수의 계급이었고, 상황에 따라 독일 군복과 헝가리 제복을 번갈아 입었다.

 

 

 

91. <화승총>

클로드 비주아르(1840-1866)

1857년, 연철, 주철, 아말감 도금. 금 상감, 은박지, 호두나무, 실크, 은실, 금실

: 손잡이를 술 장식이 달린 빨간색과 금색의 실크 끈으로 감았다. 총신은 음각, 도금, 물결문양 금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총은 튀니지왕 시디 모하메드 2세(1810-1859)가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당시 튀니지에 종주권을 행사하는 튀르키예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튀니지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오스트리아와 좋은 관계를 맺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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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혼】

: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후계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68년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릴 만큼 건강했고 황태자 루돌프가 있어 든든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 조피 대공비의 지나친 후계자 교육으로 루돌프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1889년 자살해버렸습니다.

황태자를 잃은 황제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차기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그는 강경한 개혁 정책을 내세워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결국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방문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고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됩니다. 황제는 또다시 후계자를 잃고 다른 조카의 아들인 카를 1세를 황태자로 지목하지만 그는 2년 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왕정은 끝이 납니다.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다.

원래 그녀의 언니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황제는 엘리자베트에게 첫눈에 반했다. 1854년 4월 24일 빈의 아우구스티너 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고 그녀는 예정에 없던 황후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실 예법은 숨 쉴 틈 없이 엄격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녀의 양육권까지 대공비에게 넘겨야 했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점점 고립됐다.

끝내 오스트리아 황실에 적응하지 못한 엘리자베트에게 비극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92.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요제프 호라체크(1830-1885)

1858년, 캔버스에 유화

: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이다.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푸른빛 드레스가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 엄격한 황실은 감옥과 같았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 여행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93. <프란츠 요제프 1세>

미하이 문카치(1844-1900)

1896년경, 캔버스에 유화

: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후,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했다.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빈미술사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19세기 헝가리를 대표하는 화가 미하이 문카치는 초상화, 풍경화, 종교화 등으로 유명했다.

 

 

 

94. <스테파니 황태자비>

한스 마카르트(1840-1884)

1881년, 캔버스에 유화

: 스테파니는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1858-1889)와 17세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꽃으로 장식한 우아한 새틴 드레스를 입은 황태자비의 초상화는 약혼을 기념하여 그린 선물이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내연녀 메리 베체라(1871-1889)와 동반 자살한 뒤, 스테파니는 재혼해서 헝가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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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이, 오스트리아에 전한 조선의 마음】

: 합스부르크 왕가의 600년 역사 속에 조선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2년,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구의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를 견제하고 자국 상인들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법적으로 보호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양구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오스트리아와 조선은 수교를 맺었습니다. 수교 선물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보낸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1894년 합스부르크의 수집품으로 등록됐고, 1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와 조선이 주고받았던 마음의 증표입니다.

95-96. <투구와 갑옷>

조선, 1890-94년경

: 1892년 조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과 수교하면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수교를 기념하여 고종은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에게 선물로 조선의 투구와 갑옷을 보냈다. 네 조각으로 구성된 두구의 앞면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이, 뒷면에는 봉황 무늬가 있으며 양옆과 뒤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가리개를 달았다. 갑옷은 상체 뿐 아니라 허벅지까지 감쌀 수 있게 하였다. 고종이 직접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투구와 갑옷이다.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유산】

: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600년의 긴 시간동안 합스부르크가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루기도 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술품 수집에 열정을 쏟았고, 뛰어난 수집가이자 후원자라는 또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술이 곧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리적 힘보다 문화와 예술 역량이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합스부르크의 유산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입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감상하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켜낸 예술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전시를 보고난 후 교보문고에 들러서 샀던 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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