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시회를 다니며 기록을 남기고자
만들게 되었습니다.
전시회를 방문하기 전, 참고하셔도 좋고
못 가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장 내 작품들은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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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봉(1902-1977)》
: 도상봉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1886-1965)에게 서양화법을 배우고, 백자와 라일락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그리며 한국 아카데미즘 회화를 확립했다. 1927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한 도상봉은 일본인 주도로 진행되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참여하지 않고, 후학을 지도하는 미술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차분한 색조와 부드러운 필치로 한국 고유의 조형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도상봉은 '도자기의 샘'을 뜻하는 그의 호 '도천(陶川)'에서 엿볼 수 있듯, 조선의 백자에 애착을 갖고 이를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도상봉의 정물화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백자 위에 꽃이 가득히 꽂혀 있는 것, 백자를 중심으로 목기나 서양식 수병과 꽃을 배열하는 것, 꽃 없이 병과 과일을 배열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서울미술관 소장품 <정물>은 도상봉의 작품 중에서도 비교적 큰 사이즈에 해당하는 대표 작품이다. 단정하고 깔끔한 형태 묘사와 차분하고 섬세한 붓질, 그윽한 색조가 돋보이는 도상봉의 회화는 도자기로 대표되느 전통과 꽃이라는 자연의 조화를 통해 이상적이면서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소박하지만 우아한 멋이 돋보이는 도상봉의 작품은 예술에 있어 꾸밈없이 기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회화관이 구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도상봉 화백의 <정물>은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의 표지에 나온 작품입니다. 책에서 보며 감탄했던 작품을 실물로 직접 보니 참으로 신기했고, 꼭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도상봉 화백은 도자기 속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고 하는데, 내게는 달항아리와 화병을 그린 도상봉 화백의 정물화가 꼭 그런 울림을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소박하고 우아한 이 기물들 속에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아도 회로애락의 정서가 그림 속에 자리하고 있지요.
왼) 정물
1954, 캔버스에 유채, 72.5*90.5cm
오) 국화
1973, 캔버스에 유채, 65*53cm
-나의 가장 친우인 조선백자들도
항상 그 속에 미소를 띠고 있다.
유백색의 변화와 항아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무성의
노래는 나에게 신비한 교훈과 기쁨을 던져준다.
정물
1975, 캔버스에 유채, 23*32cm
비진도의 여름
1972, 캔버스에 유채, 22*3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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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1914-1965)》
: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만종(1857-1859)'을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해 유학의 꿈을 포기한 채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출신의 화가들과 달리 지방에서 홀로 그림을 공부해야 했던 박수근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엽서와 도록, 신문 등의 매체를 통해 그림을 공부하며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봄이 오다(1932)>로 제 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박수근은 자신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과 일상 풍경을 그리며 서민들의 따뜻하고 선한 마음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특히 돌과 같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마티에르는 박수근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우리나라의 옛 석탑과 석불을 연상시키는 화강암의 표면에서 착안했다.
서울미술관의 소장품 <우물가(집)>은 제 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 작품이다.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사실적인 묘사는 흐려지고 대상이 단순화되는 것이 특징이며, 흰옷을 입은 여인과 빨래하는 모습 등 이전부터 박수근이 천착해왔던 소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황갈색의 두꺼운 표면 위에 대상의 윤곽선이 우아한 곡선을 이루며 뚜렷하게 살아있다. 이러한 박수근 특유의 두꺼운 마티에르는 단순히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 물감을 쌓아 올리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한국의 석탑과 석불에서 느꼈던 감응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수집가의 문장·
: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수근 그림 속 어머니의 모습은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2002년 갤러리 현대에서 <한국의 화가 박수근> 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박수근 선생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보는데, 그 안에서 마디 굵은 손으로 주름진 일생을 일구며 사셨던 어머니가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그림 앞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 듯 가슴이 뛰었고 그 자리에서 <젖 먹이는 아내(모자)> 드로잉 20호를 구입했습니다. 제게 이 작품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상기시키며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위로해주는 작품입니다.
젖 먹이는 아내(모자)
1958, 종이에 연필, 73*51cm
여인과 소녀들
1964, 하드보드에 유채, 24*30cm
노상
1961, 종이에 연필, 20.5*43.5cm
우물가(집)
1953, 캔버스에 유채, 78.5*99cm
·수집가의 문장·
: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이 살아있는 <우물가(집)>는 몇 점 없는 박수근 화백의 대작입니다. 박수근 화백과 아내 김복순 여사는 그림을 전람회에 출품하고 낙선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전해지죠. 하나님도 그 노력과 정성에 감탄하셨는지, 박수근 화백은 이 작품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 상을 받았다는 영광스러운 이력보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화가의 간절한 마음이 절로 느껴졌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사업을 하며 저 역시 아내와 열심히 기도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간절히 바라고 진심을 다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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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1914-2001)》
: 1914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8살에 장티푸스로 인해 청각장애를 얻었으나, 일찍이 그림에 탁원한 재능을 보여 김은호(1892-1979)의 화숙 '낙청헌'에서 그림을 배웠다. 김은호로부터 전통채색기법과 더불어 서양화, 일본화 기법을 배운 김기창은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1931)>로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제15회 선전까지 6회 연속 입선하였으며, 연 4회 이상의 특선을 수상하며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선전 추천 작가가 되었다.
김기창은 섬세한 필법이 돋보이는 인물화와 풍속화를 다수 제작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 '예수의 생애' 연작 39점을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6.25 전쟁 중 그린 작품이다. 군산 구암동 피난 시절 김기창은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직후 붓을 들기 시작하여 2년여에 걸쳐 29점의 성화를 제작했다. 이후 독일인 선교사가 예수님이 부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을 권유하여 마지막에 '부활' 작품이 추가되어 총 30점의 연작으로 구성되었다. 예수의 생애는 이미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다뤄왔던 소재이지만, 김기창의 성화에서는 줄곧 서구인의 시각으로 재현되었던 예수의 모습이 아닌,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한국인의 모습으로 해석한 예수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김기창의 신앙적 고백이자 풍속화가로서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독일 정부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에서 소개되었다.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성화로써 다른 유럽의 성화와는 구별되어 단독 특별관에 전시되었다.
·수집가의 문장·
: 저는 김기창 화백이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로 비유하자면, 김기창은 지휘자와 같은 화가이죠. 긴 이야기 속에서 단 몇 개의 장면만을 뽑아내고, 그것으로 전체를 이야기할 수 있는 화각가 몇이나 있을까요.
1998년 IMF 시절, 이전 소장가가 경제적 어려움에 내놓은 '예술의 생애' 30점 모두를 당시 빌딩 두 채의 값을 주고 품에 안았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시리즈 전체를 사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한국전쟁 중에 그려진 이 귀한 작품들이 지난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독일 역사박물관에 초청을 받아 기독교 미술사의 가장 주요한 작품으로 소개되며 전시됐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가 한국에서 토착화된 예수의 모습으로 다시 유럽인들에게 신앙적, 미적 감동을 선사한 순간이었죠.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지만, 제일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에 맞게 그려 예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한 것은 김기창 화백이라고 생각합니다.
1. 수태고지
2. 아기예수의 탄생
3. 동방박사들의 경배
4. 아기예수 이집트로 피난
5. 헤롯왕의 아이들 학살
6. 소년예수, 학자들과 문답
7. 요한에게 세례받음
8. 사탄에게 시험받다
9. 제자들을 만남
10. 산상설교
11. 사마리아의 여인
12. 병자 고치다
13. 오천인을 먹임
14. 물위를 걷다
15.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16. 탕자 돌아오다
17. 어린이들을 축복하다
18.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19. 여인, 예수의 발을 씻음
20. 예술살렘 입성
21. 최후의 만찬
22. 게세마니 동산의 기도
23. 재판 받다
24. 수난 당하다
25. 십자가를 지고
26. 십자가에 못박힘
27.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28. 부활
29. 막달라 마리아와 만남
30. 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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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1924-2015)》
: '한(恨)의 화가' 혹은 '꽃의 화가'라 불리는 천경자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의 정서를 여인과 뱀, 꽃에 투영한 채색화를 선보였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후 천옥자에서 '경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르고, 1942-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며 본격적으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수묵화 중심의 동양화단에서 채색화는 일본색이 짙다는 이유로 배척받았으나, 천경자는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고 작품에 문학적인 성격을 부여하며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작품에 자신의 이야기를 줄곧 투영해왔던 천경자는 1970년대부터 세계 각지를 누비며 외국의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드로잉과 회화로 남겼다. 여인을 둘러싼 동물들이 평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내 슬픈 절설의 49페이지>는 아프리카 초원의 이미지에 자신의 49세 인생을 중첩시킨 대작으로 1년여에 걸친 긴 작업이었다. 천경자의 수필 「내 슬픈 전설의 첫 페이지」에서 제목을 빌려온 자전적인 작품으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 고객를 숙이고 쪼그려 앉아 흐느끼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슬픔의 정서를 작품으로 승화하고 있다.
<고(孤)>, <청혼>, <청춘> 속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의 모습은 대표적인 천경자의 도상이다. 꽃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인생의 모든 역경을 딛고 피워낸 꽃을 의미하는데,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여인은 오랜 세월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과 아픔을 그림으로 치유하고 있는 작가 스스로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소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지키고자 했던 집념, 나를 어렵게 했던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런 것들이 화폭에서 절절히 느껴져 이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갈망하던 이 작품을 어렵게 미술시장에서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전 재산을 털어서 이 작품을 구입하고 오랜 시간 거실에 걸어두고 그림을 감상했습니다.
노을 지는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모든 동물이 평화롭게 뛰노는 모습과 듬직한 코끼리 등 위에서 다시 한번 생에 대한 다짐을 키우며 일어서려는 여인의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자화상
1969, 종이에 잉크, 61*47cm
-숨이 콱 막힐 듯한 이 방에서 나는 그저 화판에다 추억 속 무언가를 재생시켜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유일한 삶이요, 즐거움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여인
1974, 종이에 잉크, 20.5*15.2cm
개구리
1970년대, 종이에 채색, 34*34cm
조락(凋落)
1947, 종이에 채색, 56*64cm
새
1973, 종이에 채색, 58.5*39cm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162cm
청혼
1989, 종이에 채색, 40*31cm
고(孤)
1974, 종이에 채색, 38.5*23.3cm
청춘
1973, 종이에 채색, 57*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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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직순(1921-1996)》
: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배운 임직순은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로 입선한 후 해마다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며 화단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화려한 색채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풍부하고 강렬한 인상의 작품을 선보였고, 동시에 대담한 붓터치를 통해 유채물감의 특유의 매체적 특징을 살렸다. 임직순은 주로 실내의 여인상, 꽃과 소녀, 꽃 중심의 정물을 즐겨 그렸으며,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을 통해 색채의 생동감과 대상의 내면에 깃든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한편, 그는 계절의 분위기를 살린 풍경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표현하기도 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과 맑고 높은 하늘을 그린 <산의 정경>에서는 가을의 정취가, 산등성을 따라 잔설이 보이는 <외설악이 보이는 풍경>에서는 초겨울 혹은 초봄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처럼 임직순의 작품은 소재가 무엇이든 노랑, 주황, 빨강 등 강렬한 난색과 두꺼운 마티에르, 과감한 붓터치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수집가의 문장·
: 임직순 화백의 작품은 화폭을 채운 색 하나하나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강렬한 원색들이 오묘하게 섞이며 조화를 이루고 있죠.
<소녀>는 미술 경매에서 유찰이 된 작품인데, 제게는 해외의 명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구입을 결정하자마자 그 자리에 동석했던 한 분이 1000만원을 더 줄 테니 자신에게 되팔라더군요.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마음을 흔드는 그림 한 점을 온전히 가지는 것이 그 어떤 금전적 이득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숱한 그림들이 증명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소녀
1986, 캔버스에 유채, 71*59cm
화실
1982, 캔버스에 유채, 130*161cm
꽃과 여인
1984, 캔버스에 유채, 81.5*69.5cm
소녀
1980, 캔버스에 유채, 44*37cm
(+소녀 작품 뒷면)
산의 정경
1991, 캔버스에 유채, 45.5*53cm
외설악이 보이는 풍경
1986, 캔버스에 유채, 58*77.5cm
정물
1993, 캔버스에 유채, 53*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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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1916-2002)》
: 1916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1935년 동경 문화학원에 진학하여 당시 일본에서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미술을 수용했다. 1947년 김환기, 이규상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그룹이었던 '신사실파'를 창립했고, 이후에도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등 한국의 전위적인 미술 단체를 이끌며 한국 모더니즘 미술 정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기까지만 해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형식을 실험적으로 모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지만,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신만의 양식을 구축해나갔다. 산을 그린 작품이 많아 '산의 화가'라고도 불리는 유영국은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닌,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기반으로 고향 울진의 자연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평면화된 색면들은 유영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꼽았던 피에트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상을 단순화하여 그것이 지닌 본질을 표현하고자 하는 유영국의 회화는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구라는 대립적인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수집가의 문장·
: 유영국 화백은 고향의 울진에 있던 산을 그렸는데, 산이 많은 산정동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 이 작품들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한편으로는 '장롱 컬렉터'로서의 삶을 반성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작품들이기도 하지요.
처음 유영국 화백의 작품을 수집하고서는 혼자 보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 놓고 보니 내가 이런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많은 사람과 작품을 나눌 때 눈 앞의 산이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며, 새로운 산으로 다가온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순간이었습니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따릅니다. 하나는 내 생활에 아름다움이 공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름다움을 남들과 나누는 기쁨이 생긴다는 것이죠. 수집의 즐거움은 단순히 모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호를 주변 사람과 나누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그 즐거움이 배가 될 수 있지요.
Work
1988, 캔버스에 유채, 72.8*100cm
-나는 금산도 싫고 금논도 싫고,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오.
움직이는 산
1980, 캔버스에 유채, 91*116.8cm
-유영국이 가장 존경하던 작가는 몬드리안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구성, 수직과 수평의 절제된 균형 감각의
몬드리안 작품이 "말이 없어서 좋았다" 했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산
1989, 캔버스에 유채, 135*135cm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연(連)
1966, 캔버스에 유채, 88.2*88.2cm
-그림 그릴 엄두도 안 나고, 그리려고 해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 길이 없어요. 답답해서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온 추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를 내 나름대로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보 후퇴한 거지요.
무제
1960, 캔버스에 유채, 130*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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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1921-2005)》
: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이대원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경복고 재학 중 17살의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연이어 입선하며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미대가 아닌 법학과에 진학해야 했던 이대원은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수현에게 사군자와 글씨를 배우며 한국의 전통적인 점과 선의 기법을 터득했다.
그는 이렇게 터득한 동양화의 필법을 응용하여 유채 물감으로 밝은 원색의 점과 선을 리듬감 있게 표현하며 동양화의 기운생동을 화폭에 담아냈다. 1960년대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단색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대원은 산과 나무, 연못과 과수원 등 자연 풍경을 그리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이어갔다. 눈에 보이는 나무의 모습을 담은 화면에는 구상적인 측면이 있으나, 색채와 구도에서는 원근법과 투시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석한 이대원만의 작가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과 빛의 향연이 돋보이는 이대원의 작품은 언뜻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연상시키지만, 생동감 있는 빠른 필치로 구현된 무수한 선과 점은 한국화의 준법을 계승한 것에 가깝다.
또한 이대원은 5개 국어에 능통한 지식인으로서 외교통상부 문화홍보 대사로 활동하며 해외에 한국 미술을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탁월한 안목과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화랑인 반도화랑을 초대 운영하며 한국 미술 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수집가의 문장·
: <사과나무>는 이대원 화백이 인생의 말기에 그린 걸작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커다란 캔버스에 수십 개의 사과를 그렸죠. 그래서인지 이대원 화백만이 표현할 수 있었던 유채의 기운생동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이대원 화백은 '화가의 눈에는 같은 것을 보아도 늘 다르게 보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너른 사과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 듭니다. 작품 속에 녹아든 삶에 대한 즐거움의 시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생생한 에너지를 포착하는 시선.
이러한 화가의 시선들이 생동감 넘치는 화면에 응축되어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풍요로운 내면의 풍경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못(Pond): 1989, 캔버스에 유채, 44*51.5cm
못(Pond): 1990, 캔버스에 유채, 53*72cm
농원: 1991, 캔버스에 유채, 52.5*73cm
산: 1974, 캔버스에 유채, 44*52cm
담장: 1965, 캔버스에 유채, 65*50cm
산: 1977, 캔버스에 유채, 45*52cm
농원: 1989, 캔버스에 유채, 77*99.5cm
농원: 1996, 캔버스에 유채, 53*72cm
초가: 1976, 캔버스에 유채, 44*52cm
농원: 1982, 캔버스에 유채, 65*90cm
인왕산: 1978, 캔버스에 유채, 44*53cm
나무: 1979, 캔버스에 유채, 45*52.5cm
산: 1977, 캔버스에 유채, 49*59cm
사과나무
2000, 캔버스에 유채, 200*500cm
-파노라마 사진같이 과수원의 춘하추동을 그려보고 싶어.
재료는 서양 것이어도 마음은 자꾸 동양화에 다가서는 걸 느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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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묵(1914-2016)》
: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한 한묵은 1940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가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02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파리에서 활동한 한묵은 유화, 수채화, 판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특히 프랑스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회화와 콜라주 기법을 이용한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선보였다.
한묵의 작품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평면구성' 시기와 '공간 다이나미즘' 시기로 양분된다. 전기가 2차원적인 평면성에 대한 탐구였다면, 후기의 작품은 1969년 인간의 달 착륙에 영감을 받아 시공간이 결합된 우주의 4차원적 공간감을 구현하고 있다. 서울미술관 소장품 <무제>에는 이러한 역동적인 우주 공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대형화폭에 방사형으로 퍼지며 중첩되는 기하학적인 면, 지그재그 형태로 이어지는 선의 리듬과 화려한 색채의 울림은 광활한 우주 공간과 함께 역동적인 속도감을 자아낸다. 화면 밖으로 확장되는 운동감은 <푸른 나선>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나선과 원형이 주가 된 화면은 마치 생명을 지닌 유기물처럼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창출하며 한묵의 생명주의적인 접근법을 가시화한다. 마치 옵아트(Op Art)나 컴퓨터 그래픽과 같이 완벽한 조형미 속에 착시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은 우주의 무한함을 재현하며 한국 기하학적 추상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집가의 문장·
: 102세로 장수의 삶을 사신 한묵 선생님께서 서울미술관의 개관전에 선보인 작품 <무제>를 보고자 프랑스에서 오신 적이 있습니다.
본인의 작품 앞에 서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면서 친분이 있었던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을 회고하셨지요. 그때 선생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계기가 된다면 자신의 대표작 <푸른 나선>을 서울미술관에서 꼭 전시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죠. 10년이 흘러서야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말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한묵 선생님께서 예언을 하신 것 같습니다. 순간의 존재인 우리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끝없이 움직이는 현실을 자각하기를 원하셨겠지요. 지금쯤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무한하고 초월적인 세계에서 이 작품이 서울미술관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고 흐못해 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제
1982, 캔버스와 종이에 채색, 140*73cm
원색의 비상(飛翔)
1986, 콜라주, 130*162cm
황색(黃色)의 핵(核)
1986, 콜라주, 130*162cm
푸른 나선
1975, 캔버스에 아크릴, 198*15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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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1916-1956)》
: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임용련에게 그림을 배웠다. 당시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학에서 드로잉으로 수석 졸업을 할 만큼 드로잉 실력이 뛰어난 화가였는데, 이에 이중섭 또한 임용련의 영향을 받아 많은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이중섭의 작품은 크게 드로잉, 유화, 수채화, 엽서화, 은지화, 삽화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채색화의 경우에도 소묘가 중심이 되며, 표현주의적인 채색 방식과 함께 물감을 칠한 뒤 긁어내거나 연필로 누르듯 드로잉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이렇게 재료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과 기법을 창안해낸 이중섭은 특히 남다른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소'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서울미술관의 대표 소장품 <황소>는 이러한 이중섭 회화의 개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페인트와 유채를 섞은 혼합재료로 제작된 이 작품은 공업 안료의 특성으로 인해 종이의 우글거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가난으로 인해 유화를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못해 페인트와 종이를 사용했다고 알려졌지만, 이중섭에게 페인트는 단순히 물감의 대체제가 아닌 자신만의 역동적인 표현을 살리기 위한 재료이기도 했다. 이중섭은 짙은 선을 통해 소의 늠름한 골격을 완성하고, 그 위에 금방 마르고 흘러내리는 페인트의 속성을 살려 특유의 빠르고 힘 있는 붓터치를 구사하며 소의 역동적인 동세를 완벽히 표현했다. 이처럼 당당한 기세를 자랑하는 이중섭의 소는 개인적인 고통과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굳건하게 이겨내고자 하는 이중섭의 강한 의지를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1983년 9월, 태풍 포레스트가 많은 비를 뿌리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명동 성모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액자 가게의 처마 밑으로 피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이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참 못 그렸다.'
그림을 보고 들었던 첫 생각입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처음 봤을 때는 그 집 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림이 아니고 사진이라는 얘기를 듣고 값을 흥정해 7,000원을 주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사진을 계속 보고 있으니 처음으로 원화가 갖고 싶어지더군요. 그러나 진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또 그 값이 저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2010년 6월 29일, 이중섭의 <황소>가 미술시장에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던 작품이 이제는 빌딩 한 채 값이 되어 있었고, 아무리 미술품이 좋아도 수집가로서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작품을 드디어 품에 안을 기회가 온 만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당시 아끼던 소장품인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을 되팔고 나머지 금액만 지급하는 방식으로
거래했습니다.
30년 전 처음 사진으로 <황소>를 만나고 30년 뒤 진품 <황소>를 소장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중섭과 깊은 친분을 쌓은 기분이 듭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인연인지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과 그림에도 뿌리 깊은 인연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때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황소
1953년경,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35.5*52cm
(+작품 뒷면)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판화), 29.5*64.5cm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1950년대,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32.8cm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청나게 귀엽고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사람들! 조금만 더 참으면 되오. 우리 서로 더욱더욱 힘을 냅시다. 태현이와 태성이에겐 아빠가 꼭 자전거 한 대씩 사주겠다고 분명히 일러주시오. 그럼 몸 성히 힘을 내어 기다리시오. 소중한 몸을 더욱 소중히 해서 기다려주시오."
(1955년 이중섭이 부인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 中)
활 쏘는 남자
1941, 종이에 잉크와 수채, 14*9cm
우주03
1941, 종이에 잉크와 수채, 14*9cm
사랑의 열매를 그대에게
1941, 종이에 잉크와 수채, 14*9cm
우주04
1941, 종이에 잉크와 수채, 14*9cm
하나가 되는
1941, 종이에 청먹과 수채, 14*9cm
우주01
1941, 종이에 잉크와 수채, 9*14cm
아이들놀이
연도미상, 은지에 새김, 유채, 9*15cm
가족
1953년경, 은지에 새김, 유채, 8.5*15cm
아이들과 비둘기
1953년경, 은지에 새김, 유채, 10*15.5cm
네 어린이와 비둘기
1950년대, 종이에 연필, 31.5*48.5cm
길(Road)
1953, 종이에 유채, 40*27.5cm
·수집가의 문장·
: "이중섭은 지우개가 필요 없는 작가다."
시인 고은 선생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고 소장하게 된 작품이 바로 은지화 <가족>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소장한 이중섭 화백의 작품이기도 하죠. 1991년도에 500만원 주고 처음 산 작품입니다.
<황소>에서 이중섭만의 강렬한 붓터치가 돋보인다면, 은지화에서는 그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이 돋보입니다. 돈이 없어 담뱃값 은지 위에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졌는데, 오히려 은지에 새기는 방식이었기에 이중섭만의 역동적인 드로잉이 더욱 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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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1904-1989)》
: 1904년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동양의 서화 전통을 활용하여 현대적인 추상화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전통 사군자 작가로 미술에 입문했던 그는 1937년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화풍을 습득한 뒤, 서화의 필묵법을 응용하되 서구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도입하여 자연의 이미지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반추상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본격적으로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콜라주 추상작품을 제작했다.
이응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문자를 활용한 새로운 추상 작업에 몰두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익힌 서예를 바탕으로 자연의 형태를 추상화하거나, 한자의 음과 뜻을 획과 점이라는 조형적 형태로 표현했다. 한글과 한자가 내포하고 있는 추상적인 패턴에 주목하여 이를 다양하게 조합했던 이응노는 재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한지를 서구의 콜라주 기법으로 응용했다. 한지에 솜을 붙이고 그 위에 채색한 이응노의 작품은 화면에 양식적인 분열을 가했던 콜라주와 달리, 종잇조각과 화면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로움을 추구했다.한자가 자연과 인간의 생각을 기호화하여 만들어진 문자라는 점에 주목했던 이응노는 인간의 형상을 작업의 중심에 두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개척해 나갔다.
·수집가의 문장·
: "보무당당[步武堂堂]"
저는 이응노의 <수탉>을 저만의 제목인 '보무당당'으로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2005년 조선일보에서 닭띠 해를 기념하며 신문에 실었던 이미지를 보고 그 당당한 기세가 느껴져 구입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길로 곧장 한 갤러리의 대표에게 부탁해 6개월 만에 본 작품을 소장할 수 있었습니다.
닭은 울음소리로 새벽을 깨우는 신비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수탉의 울음을 통해 죄를 깨닫지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여는 닭의 당당한 자세를 보고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습니다.
수탉
1960, 종이에 수묵담채, 140*70cm
문자추상
1964, 종이에 채색, 138.5*70cm
구성
1976, 한지에 채색, 3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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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1945~)》
: 이왈종은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9년부터 추계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는 1991년 교수직을 떠나 제주 서귀포시에 정착하여 제주의 풍정을 담아내는 작품에 천착하고 있다.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2013, 장지 위에 혼합재료, 179*264cm
제주생활의 중도(中道)
2013, 장지 위에 혼합재료, 187*224.5cm
《제주생활의 중도》 연작은 '세상 만물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불교의 중도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작가가 말하는 생활의 중도란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사슴, 물고기, 새, 꽃 등의 모든 생물이 인간과 같은 선상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상 세계이다. 이왈종은 이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골프 치는 사람, 요가 하는 사람들을 그려 넣기도 하는데,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담아낸 자신의 작품을 작가는 현대판 풍속화라고 칭한다. 이처럼 예술적인 열망과 실생활의 욕망 중간에서 탄생한 이왈종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작가의 사유이자 그들의 현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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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균(1956~)》
: 198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오치균은 뉴욕 브루클린대학 대학원 재학 당시 우수한 실기 성적으로 2년 연속 장학금을 받았다. 1987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줄곧 뉴욕에서 활동을 이어오던 오치균은 1995년 뉴 멕시코 주 산타페로 이주하면서 산타페의 풍경을 그리기도 했고, 1997년 귀국한 후부터는 서울, 사북 등 한국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오치균의 회화는 붓이 아닌 손으로 그려 두꺼운 물감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치균은 핑거페인팅이라 불리는 기법을 통해 손으로 안료를 두껍게 쌓아 올린 흔적을 그대로 남기며 신체와 물질의 만남을 형상화한다. 가까이서 볼 때는 치밀하게 쌓아올린 안료의 형태만이 보이고, 거리를 둘수록 사물의 형상이 드러나는 그의 작품은 실존하는 모든 대상이 시간의 퇴적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한편 오치균은 2008년부터 시골 풍경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감'을 즐겨 그렸다. 유년 시절 오치균의 집 앞마당 가운데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작가에게 감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아내는 소재이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오치균의 감 연작은 파란 하늘에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진홍빛의 감이 조화를 이루며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긴다. 사실적이면서도 손으로 물감을 두텁게 누르고 문지르는 오치균 특유의 서정적인 화법을 만나볼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오치균의 <감>을 보고 있으면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시 속의 대추처럼 감 역시 나뭇가지에 아스라슬하게 매달려 혹독한 여름을 이겨내고, 마침내 주홍빛 얼굴을 드러내며 강인한 생명력과 자연의 경이로움을 자랑하지요.
오치균은 이러한 감의 시가을 붓 대신 자신의 손가락으로 물감을 찍어 발라 표현했습니다. 그의 손끝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물감에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몰입했던 작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캔버스 전체에서 생명의 힘이 느껴지지요.
오치균의 감에는 혹독한 여름을 버티고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단풍이 곱게 물든 석파정의 모습처럼 가을의 정취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감
2010, 캔버스에 아크릴, 160*80cm (each)
감
2010, 캔버스에 아크릴, 107*162cm
감
2010, 캔버스에 아크릴, 70*1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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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1913-1974)》
: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1930년대 일본 유학시절 일본의 전위적인 미술가들과 교류하며 서구의 추상미술을 수용했다. 1935년 <종달새 노래할 때>로 일본의 이과전에 입선한 후 일본의 전위 추상미술 그룹이었던 자유미술가 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한국 최초의 추상미술그룹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유영국, 이규상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김환기는 여러 도시를 오가며 활동했는데, 이에 기반하여 그의 작품 전개 과정은 일본 유학시기(1933-1937), 제1기 서울시기(1937-1956), 파리시기(1956-1959), 제2기 서울시기(1959-1963), 뉴욕시기(1965-1974)로 구분할 수 있다. 서구의 추상 양식을 수용하되 내용에 있어서는 한국의 정체성을 담고자 했던 김환기는 강, 산, 달, 구름 등 우리 자연의 모습과 백자 항아리, 목가구 등 전통 기물에 담긴 아름다움을 점, 선, 색의 조화로 이루어진 추상미술로 구현했다.
1963년 뉴욕으로 떠난 김환기는 완전히 추상의 세계에 몰입하여 구상적인 형태를 제거하고, 자연의 모티브를 지향하는 자신의 예술관을 점을 찍는 행위로 승화시킨 점화 작업을 선보였다. <26-Ⅱ-69 #41>에서 뉴욕 초기 시절 함축적이고 절제된 조형적 실험이 돋보인다면, 작고하기 직전에 제작한 <십만 개의 점>은 화면을 가득 채운 무수한 점을 통해 마치 우주와 같은 초월적인 세계를 구현하며 절정기에 이른 김환기의 조형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아침의 메아리 4-Ⅷ-65
1965, 캔버스에 유채, 177*126.5cm
<아침의 메아리> 작품 뒷면
26-Ⅱ-69 #41
1969,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26-Ⅱ-69 #41> 작품 뒷면 / 제작 당시 일기
십만 개의 점 04-Ⅵ-73 #316
1973, 면천에 유채, 263*205cm
·수집가의 문장·
: 제가 생각하는 김환기 화백의 인생 걸작은 <십만 개의 점>입니다.
오늘날 김환기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받는 대표작은 <우주>, <하늘과 땅>, 그리고 <십만개의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십만 개의 점>을 역작으로 꼽는 이유는 이 안에 <우주>와 <하늘과 땅>의 구성이 모두 녹아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작품에는 다른 두 작품에 없는 사각 도상이 더해져 우리가 사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연상시키는 구성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 그야말로 김환기의 예술 세계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가는 끝내 본인이 다 쏟아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그 부족했던 부분은 후대의 우리가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소장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100억이 넘어가는 가격을 듣고 좌절했습니다. 지금껏 비싸더라도 미술사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은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사야겠다는 의지로 이 길을 걸어왔지만, 100억이라는 돈은 쉽게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 작품이 외국으로 나가면 김환기 최고의 작품을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아끼고 아꼈던 자식 같은 소장품들을 팔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 모든 작품을 합친 것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인지, 어쩌면 김환기 화백이 실패라고 했던 것처럼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실패한 선택이라고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로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로 세지 않아도 되는 것만큼 마음의 위로를 주는 것도 없지요.
<십만 개의 점> 작품 뒷면
김환기 <십만 개의 점>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
섬 스케치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80*99.6cm
<섬 스케치>는 김환기의 초기 작품으로 오랫동안 흑백 사진으로 전해지다가, 2013년 9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김환기의 초기 작품이 얼마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치가 큰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는 김환기의 고향인 안좌도의 풍경으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의 윤곽선은 기본적인 형태감만 남긴 채 극도로 단순화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사물을 조각 조각 분해한 뒤 평면 위에 재배열하고 중첩시킨 입체파의 조형원리를 따른 것이다. 또한 밑 색을 칠한 뒤 그 위에 다른 색으로 덧칠을 하여 사이사이 밑 색을 보여주는 기법은 이후 김환기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이 된다.
·수집가의 문장·
: <섬 스케치>는 흑백 사진의 도판으로만 남아있던 작품이 수십 년 만에 경매에 나오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컬렉터가 김환기 화백에게 직접 구입해 평생을 본인의 거실에 걸어두었던 작품이 2013년 9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며 현존했다는 것이 국내에 알려졌지요. 김환기 화백의 초기 작품은 한국전쟁을 비롯한 여러 수난으로 인해 얼마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굉장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죠.
저는 미술품을 수집할 때 단순히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유일한 것을 소장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제가 미술품을 수집하며 무엇보다 기쁨을 느끼는 것은 규모의 논리와 예술의 권위에서 벗어나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에 역사적인 우리 그림들을 걸어둘 수 있다는 것, 우리 손으로 작품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들과 향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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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진(1924-2019)》
: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1회로 입학한 문학진은 초기 작업에서는 조르주 브라크의 입체주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순수추상을 주로 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기록화 제작에 힘 쏟으며 <행주산성대첩도(1978)>와 같은 공식 기록화를 남기기도 했다.
문학진은 주로 정물과 인물을 즐겨 그렸는데, 그는 색체의 통일과 조화에 중점을 두어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공간을 제시했다. 안정된 구도와 차분한 색감에 의한 정적인 분위기는 문학진 작품의 주요 특징으로, 그는 인물과 정물을 주요 소재로 하되 형태를 간략하게 변형시키고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화면에 재배치함으로써 반추상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색채적인 특성으로는 검정과 흰색이 조화를 이룬 회백색조의 화면에 파란색과 노란색을 가미하여 미묘한 색감을 연출했는데, 이러한 색채의 변주는 기물들의 질감 표현과 어우러져 장식적 효과를 자아낸다.
오로지 자신만의 작업 세계에 몰두했던 문학진은 탐구적인 자세를 지닌 내공형의 작가로서, 그가 빚어낸 인물과 정물의 형상은 대상을 바라보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작가의 머릿속에서 재해석된 상상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한국 근현대 미술품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산업화 등 다사다난한 역사 속에 몽우리를 맺다보니 소실되거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험난한 세월을 거친 이 곳의 작품들은 보화와 같지요.
무학진 화백은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1세대 대표 주자이자 한국 교회 성미술계(가톨릭미술)의 전설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인 명동 대성당에 걸린 문학진 화백의 성인화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신앙적 울림을 전달하고 있지요.
저는 그의 일생을 단순한 '화가로서의 삶'이 아닌, 붓을 통해 하느님께 평생을 바쳐 소명을 다했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가치가 어려움 속에서 빛을 발한만큼, 한국 미술을 보존하고 지키며 오랫동안 사랑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나부(Nude Woman)와 그 주변
1990, 캔버스에 유채, 81*117cm
두 개의 의자가 있는 정물
1987, 캔버스에 유채, 100.5*100.5cm
소녀와 바이올린
1957, 캔버스에 유채, 100.5*80.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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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림(1916-1985)》
: 향토적이고 민속적인 정감을 구현하는 최영림은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유화로 첫 입선을 하고 1938년 동경 다이헤이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평양 태생이었던 그는 한국전쟁 때 월남한 후 1957년 창작미술협회, 1967년 구상전 창립에 참여했다.
최영림의 작품 시기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1950년대 '흑색시대'에는 추상과 반추상형식의 작품을 제작했고, 1960년대 이후 '황색시대'에는 민담이나 설화를 기반으로 구상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최영림은 화면 자체에 황토색의 흙모래를 도입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색감과 질박한 마티에르를 구현했다. 화면에 짙게 깔린 향토적인 정서는 우리 것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더불어 피난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온 작가의 향수와 그리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여름날>에 등장하는 천진난만한 인물들의 모습은 최영림 작품의 특징으로 작가는 대지의 색 위에 에로틱한 여인상부터 온화한 어머니, 부처, 아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밝고 명량한 표정으로 나타낸다. 그의 말년작 <봄동산>은 화풍의 완숙미가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꽃이 만발한 언덕에서 아이를 업은 여인과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작가가 꿈꿨던 이상향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봄동산>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주관했던 한일 교류전시에 초대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출품된 바 있다.
·수집가의 문장·
: <봄동산>은 과거 한국과 일본이 문화교류전시를 개최했을 때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선정되어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최영림 선생은 이중섭 화백과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작품 속 등장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묘하게 닮았습니다.
평양 태생이었던 최영림 화백의 작품에는 고분벽화의 토벽을 연상시키는 향토적인 느낌이 잘 살아 있습니다. 당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형상화하고 있는 고분벽화처럼 최영림 화백의 작품에도 우리의 한국적 정서가 짙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봄동산
1982, 캔버스에 유채, 127*191cm
하동
1974, 캔버스에 유채, 57*7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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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유(1926-2002)》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동판화를 작업했다고 알려진 김상유는 1960년 초 미국과 일본의 미술 잡지를 통해 판화를 독학했고, 1963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첫 동판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후 도쿄,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각종 국제판화 비엔날레에 판화 작품을 출품하고 1970년 제1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이처럼 김상유는 판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1980년부터는 꾸준히 유화 작품을 선보이며 서양화가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개척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김상유는 유화 작업에 집중했는데, 판화에서 유화로 재료와 기법만 변경됐을 뿐 작품의 소재는 꾸준히 이어갔다. 전국의 고건축을 순례하며 보았던 한옥과 법당의 공간에 아름다움을 느낌 김상유는 주로 산사의 암자, 정자, 누각 등 전통적인 건축물을 즐겨 그렸다. 아울러 공간 속에는 부처나 스님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 세상을 관조하는 듯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모든 것을 비우려는 듯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인물은 김상유의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소박한 삶과 정서, 명상의 세계를 단순하면서도 순수한 이미지로 구현한 김상유의 작품에서 눈에 보이는 대상보다는 그리는 이의 내면을 담는 것을 중시했던 문인화(文人畵)정신을 엿볼 수 있다.
·수집가의 문장·
: 김상유 화백의 작품은 아무 말이 없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언뜻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작품은 참 순수한 모습을 하고 있지요. 2002년 한 화랑에서 김상유 선생의 전작 전시를 할 때 작품을 보고 그 순수함과 침묵 속에서 깊은 예술 철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시에 출품되었던 작품을 거의 다 구입했습니다. 아마 김상유 화백의 작품 중 80%는 서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겁니다. 김상유 선생의 평생을 송두리째 얻은 것과 다름 없지요.
마음을 비워야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다는 말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바라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임청각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5*78.5cm
심소루
2000,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5.5*89cm
애일당, 연지암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5*79cm
오산역오수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115*79cm
1. 초간암: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33cm
2. 일락정: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39*51cm
3. 청산유거: 1984,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5*38cm
4. 청량정: 1973,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3*45.5cm
5. 부부석상: 1986,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5*33cm
6. 입춘대길: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33cm
7. 태극당: 1989,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65*45.5cm
8. 무애자재: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60.5*41cm
9. 매죽헌: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79*115c
10. 간죽문: 1988,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60.5*41cm
11. 시경루: 1989,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60.5*41cm
12. 백세청풍: 1989,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3*45.5cm
13. 오산당: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2.5*40.5cm
14. 천등산대산루: 1998,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3*45.5cm
15. 무제: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2.5*40.5cm
16. 지락재: 1990,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5*53cm
17. 군자정: 1995,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45.5*37.7cm
18. 무애청정: 1987,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3*41cm
19. 대산루: 1990, 캔버스에 유채 및 아크릴, 53*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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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1919-2014)》
: 김흥수는 191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여, 함흥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17살의 나이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1944년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 후 파리로 이주하여 여러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야수파(Fauvism), 입체파(Cubism)등 서구의 추상 미술을 수용했다.
1967년 미국 펜실베니아 무어 미술대학의 초빙교수로 임용된 김흥수는 강의실에 나란히 놓인 추상화와 구상화에서 영감을 얻어 1977년 '하모니즘(Harmonism)'회화를 발표했다. 김흥수가 창시했다고 알려진 하모니즘은 '조형주의'라고도 불리는데, 한 화면에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는 회화 양식을 일컫는다. 음과 양, 주관과 객관, 추상의 우연적 요소와 사실주의의 필연적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며, 김흥수는 특히 '여체'를 다룬 누드화를 다수 제작했다.
1986년 제작된 <여인들>의 화면 좌측에는 사각형이 질서 있게 그려져 있고, 우측에는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체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김흥수에게 있어 여성의 누드는 에로티시즘이 아닌, 영감과 생명력의 근원이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여성의 누드 이미지와 기하학적인 도형의 추상 이미지를 결합하는 이 작품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화면에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하모니즘 회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한편 작품 하단에서는 김흥수가 파리 시절부터 사용했던 '김수(KIM SOU)'라는 서명을 볼 수 있다.
여인들
1986, 캔버스에 유채와 혼합매체, 130*2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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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불화
13-14세기 제작 추정, 2.6*2.2m
(실제 작품은 촬영 불가로 작품 설명만 첨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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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영(1944~)》
: 강원도 홍천 출신의 전광영은 196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을 나온 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히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뉴욕 5대 미술관 중 하나인 브루클린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한 전광영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작업을 선보이며 전 세계 미술관과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5년부터 전광영은 추상표현주의를 실험했던 초기 회화 위주의 작업에서 벗어나 한지를 활용한 《집합(Aggregation)》 연작을 선보였다. 전광영의 '집합'연작은 고서 한지로 섬세하게 싼 수천 개의 삼각형 스티로품을 한지로 꼬아 만든 끈으로 묶고, 이를 염색하여 프레임 안에 촘촘하게 집결시킨 작품이다. 서로 다른 크기와 명암을 지닌 삼각형의 조각들이 밀도 있게 집합되면서 사각 평면 안에는 불규칙적인 리듬감이 형성되고, 회화이면서도 부조와 같은 작품이 완성된다.
이러한 전광영의 작품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작가는 어릴 적 한의사였던 큰아버지 댁 천장에 매달려 있던 삼각형의 한지 약 봉투를 보았던 기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가까이서 볼 때는 조각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충돌하듯 보이고, 멀리서 볼 때는 달 표면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연상시키는 전광영의 작품은 한정된 사각형의 프레임에서 나아가 은하계와 같은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집합 08-D067
2008, 장지에 혼합재료, 199*29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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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1960~)》
: 1960녀 충청북도 청주에서 출생한 강익중은 1984년 홍익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익중은 1994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함께 <멀티플 다이얼로그展>을 개최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독일의 루드비히 미술관이 선정하는 '20세기 미술작가 120명'에 선정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유학 시절 생활비 마련을 위해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던 강익중은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하여 주머니 속에 작은 캔버스를 만들고,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익중을 대표하는 3인치 작품의 시작이었다. 일과에서 영감 받은 것들을 문자와 기호, 그림으로 기록한 작품들은 하나로 융합되어 작가 자신을 표현한다.동양과 서양, 선함과 악함, 기쁨과 슬픔 등 대립적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강익중의 작품은 융합과 포용을 상징한다.
이번 번시에 출품된 작품 역시 달항아리에 민족 통일과 인류 화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강익중이 달항아리를 소재로 다룬 것은 단순히 한국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 달항아리가 '연결'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항아리는 한 번에 물레로 성형하기가 까다로워 상반부와 하반부를 다로 만들어 접합하는 기법으로 제작되는데, 작가는 이처럼 불완전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달항아리의 접합기법에서 모티브를 얻어 갈라진 남한과 북한이 하나로 통합되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다.
달항아리 E30A-2006
2006, 패널에 혼합재료, 120*120cm
달항아리 E16A-2006
2006, 패널에 혼합재료, 120*1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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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1955~)》
: 손석은 소나무 껍질과 같이 두껍고 거친 표면 위에 전통적인 도자기나 사발의 이미지를 올려놓는 작업을 선보인다. 도자기는 한국 사람들의 꾸밈없는 소박한 정서가 깃들어 있어 오랜 세월 많은 화가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던 소재다. 손석 역시 도자기를 주요 모티브로 하는데, 그는 이를 단순히 평면 캔버스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닌, 마치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작품을 제작한다.
작품의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캔버스 위에 긴 나무 블록을 세우고 그 위에 물감을 쌓아 올려 세로줄 화면을 만든다. 이때 줄의 높이를 달리하여 반워형의 곡면을 만드는데, 볼록 튀어나오는 효과를 통해 평면의 캔버스가 입체적인 캔버스로 전환된다. 그 위에 도자기의 이미지를 채색하여 완성된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며 홀로그램과 같은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감을 입히고, 마르기를 기다려 쌓아 올리는 수작업 과정은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기다림'을 의미하는 작품의 제목 'L'attente'와 같이 작가에게 있어서도 오랜 기다림의 과정 끝에 완성된 이 작품은 하나씩 쌓아 올린 축적의 결과물이자 보는 이에게도 다양한 이미지를 기다리는 공간으로써 작용한다.
기다림
연도미상, 캔버스에 혼합재료, 150*1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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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훈(1952~)》
: 한국 극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고영훈은 1970년대 <이것은 돌이다>시리즈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극사실주의는 작가의 주관성을 극도로 배제하고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사실적인 화면을 추구하는 예술 양식이지만, 고영훈의 회화는 단순히 실재하는 대상과 똑같이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영훈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달항아리를 비롯한 도자기들은 실제와 가깝게 그려졌지만, 이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포착하여 재가공된 이미지이다. 고영훈의 도자 회화는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배경에 대상과 그림자만을 그려넣어 마치 빈 공간에 도자기가 떠 있는 듯한 착각을 인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도자기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로써 고영훈의 호화는 예술에서의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고, 나아가 세계의 근본은 무엇인가와 같은 심오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달항아리
2002, 석고와 종이에 아크릴, 162*128cm
용이 놀다
2006, 석고와 종이에 아크릴, 160*126cm
자연법-봄1
2005, 종이에 아크릴, 95*197cm
스톤북
1985, 종이에 아크릴, 90*1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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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1948~)》
: 한국 2세대 단색화가로 평가받는 김태호는 1968년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입학 후, 당시 회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1세대 단색화가 박서보에게 그림을 배웠다. 서양의 기법과 기술을 받아들이되, 한국의 정서를 담아내고자 했던 단색화가들의 기조처럼, 김태호 역시 한지와 아크릴 물감을 혼합하여 물감층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을 통해 평면 캔버스 위에 물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전개한다.
그의 작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형상(Form)>시리즈, 1980년대 후반 시도한 한지 작업 및 전면화 작업,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리드 구조를 기반으로 내재적 리듬을 추구하는 <내재울(Internal Rhythm)>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내재울>연작은 캔버스에 수직과 수평의 그리드를 수없이 그리고, 그 위에 20개 이상의 물감층을 쌓아 올린 뒤 이를 다시 특수 제작된 칼로 깎아내어 완성한 작품이다. 겹겹이 쌓인 물감층의 단면은 보는 이에 따라 바다, 우주, 벌집 등 다양한 형상을 연상시키는데, 쌓기와 긁어내기로 요약되는 김태호의 작업은 지워냄으로써 오히려 드러나는 역설의 구조를 형성한다. 100호 이상의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최소한 2-3개월의 시간과 노동이 들어가는 김태호의 작품은 치열한 수행적 행위를 거듭하며 이제는 그 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로 자리 잡았다.
내재울 2009-67
2009, 캔버스에 아크릴, 163*131cm
내재울 2012-10
2012, 캔버스에 아크릴, 163*131cm
내재울 2014-14
2014, 캔버스에 아크릴, 163*13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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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화(1932~)》
: 한국 단색화의 거장 정상화는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현대작가초대전>, <악뛰엘 그룹전>,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고,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국제 전시에 한국 작가로 출품하여 이름을 알렸다.
초기에는 대상을 재현하는 구상 회화를 주로 그렸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앵포르멜 경향의 표현주의적인 추상화를 시도했다. 이후 1969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단색조 추상으로 작업을 전환한다. 시각적인 요소를 최대한 축소하고 재료의 물성을강조하며 작품에 철학적인 성찰을 담아내는 정상화의 예술은 그리는 것 대신 '뜯어내기'와 '메우기'로 창조된다. 작가는 약 3-4mm 두께로 고령토와 접착제를 섞은 징크 물감을 캔버스에 초벌로 칠한 후, 완전히 마르면 캔버스를 가로 세로로 접어가면서 바둑판 무늬의 균열을 만든다. 이후 선택한 부분의 물감을 하나씩 떼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몇 겹으로 채워 넣어 스며들거나 뭉치게 한다.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정상화의 단색화는 색체가 가진 단손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단색이 가질 수있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무제 13-5-13
2013,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무제 016-11-2
2016,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무제 12-3-5
2012, 캔버스에 아크릴, 162.2*130.3cm
무제 12-7-15
2012, 캔버스에 아크릴, 259*193.9cm
무제 12-7-3
2012, 캔버스에 아크릴, 259*19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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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1931~)》
: 한국 추상미술의 교두보라 평가받는 박서보는 1950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2기로 입학했다. 당시 홍익대학교 교수로 있었던 김환기에게 그림을 배운 박서보는 졸업하기 전부터 탁월한 역량으로 국전에 도전해 입선했으나,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1956년 반(反)국전을 선언하며 전위미술운동을 이끌었다.
1970년대부터는 그리는 대신 선을 긁어내고 긋는 <묘법(Ecriture)>시리즈로 당시 한국 화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단색화를 주도했다. 박서보의 <묘법>연작은 작가의 쉼 없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화면 전체를 균질적으로 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묘법>은 낙서와 같이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전기 묘법시대(1967-1989),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린 뒤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후기 묘법시대(1989~)로 구분할 수 있다.초기 묘법이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우는 과정에 중점을 뒀다면, 후기의 색채 묘법은 형태를 만들고 풍부한 색감을 강조한다.
작가는 닥종이를 겹겹이 화면에 올린 뒤 그 위에 젯소(Gesso)나 유색의 물감을 얹어 종이를 적시고, 다시 먹을 부어 손가락이나 도구를 이용해 종이를 밀어내며 흔적을 남긴다. 이러한 종이 작업은 유화나 아크릴 물감으로는 형성할 수 없는 재료의 물질성을 드러내고,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修身)으로서의 그리기를 강조했던 박서보의 예술 철학을 드러낸다.
묘법 No.060121
2006,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재료, 200*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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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1942~)》
: 194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이건용은 1967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1969년 S.T(Space and Times)의 결성과 A.G(Avant-Garde)의 핵심적인 구성원으로 참여한 이건용은 신체와 세계를 상호관계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며 한국 실험 미술을 이끌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입학 당시 아폴로의 정면이 아닌 뒤통수를 그려 합격할 만큼 남다른 실험정신이 있었던 이건용은 자신의 신체를 예술의 주요 매체로 활용하며 신체와 장소,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행위예술로 선보였다.
이건용은 1976년부터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는 신체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캔버스 전면에서 작업을 하는 일반적인 작가들과 달리 이건용은 캔버스 뒤에 서서 앞으로 손을 뻗어 붓질한다. 손이 닿는 곳까지 붓질을 최대한 한 뒤, 칠한 부분을 접어 같은 방식으로 붓질을 하는 그의 <바디스케이프(Body scape)>연작은 캔버스 밖에서 그림을 바라보고자 하는 현상학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발현된 결과물이다. 빈 화면에 자신의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나가는 과정을보여주는 이건용의 작품에는 신체, 장소, 관계에 대한 이건용만의 독창적인 미학과 사유의 정수가 담겨있다.
바디스케이프 76-1-2019
2019, 캔버스에 아크릴, 171.3*2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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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1956~)》
: 이배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89년부터 프랑스 파리로 유학하여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배 작품의 주요 재료는 '숯'이다. 최초의 숯 작업은 1990년에 시작됐는데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절 이배는 우연히 숯 한 포대를 발견한다. 그는 숯에서 서예의 먹을 비롯해 아이가 태어나면 솣을 문에 매다는 관습, 전통 한옥을 짓기 전 땅에 숯가루를 묻는 행위 등 숯과 연관된 한국의 다양한 몬화를 떠올렸다. 이후부터 이배는 인간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숯의 강한 질감을 살리며 드로잉, 설치, 부조화된 화면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선보였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이배의 <불로부터>는 불에 타고 남은 사물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작업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작가는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 가마에서 15일 동안 나무를 굽고, 이를 다시 15일 동안 식혀 순수한 탄소만 남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숯을 톱으로 썰어 단면을 드러내고, 아라비아고무를 사용해 캔버스 위에 붙인다. 불규칙한 숯들이 캔버스를 메우고 나면 아주 얇은 종이로 표ㅕㄴ을 깎아 광을 내어 작품을 완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배의 작품은 숯이 지닌 물질성을 생생히 재현하고, 단일한 검은색이 아닌 보는 각도에 따라 수백 가지의 다른 빛을 뿜어내는 역동적인 작품이 된다.
숯은 모든 사물의 마지막 모습이자 동시에 불을 붙이면 다시 불이 붙는다. 이렇듯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숯은 이배의 작품에서 단순한 사물을 넘어 한국의 문화를 함축하고 회화적인 언어를 초월하여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소재이다.
불로부터
2001, 캔버스에 숯, 162.2*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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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1919-1988)》
: 곽인식은 일본 니혼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정착한 재일 한국인 화가이다. 이우환과 같이 모노하 운동에 참여했던 곽인식은 입체와 오브제, 공간에 관한 실험을 통해 물질의 존재 자체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선보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곽인식은 철사, 돌, 석고 등 다양한 물질을 화면에 부착했던 이전 시기의 작품 성향에서 벗어나 일본의 전통종이인 화지 위에 작은 타원형의 형태를 연속적으로 중첩한 채묵작업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Work88-LW>역시 흰 종이 위에 원형 또는 계란형의 점들이 나열되고 중복됨으로써 공간에 깊이감을 부여하고 있다. 흡습성이 좋은 화지를 사용하여 물감이 번지는 효과가 극대화된 반투평의 색점들은 농담의 변화에 따라 투시되기도 하고, 바탕이 되는 백색 종이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면서 신비로운 화면을 연출한다. 화지를 이용한 채묵작품에는 '작업' 혹은 '무제'라는 명제가 일관되게 붙어있다. 이는 작업에 있어 불필요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의 선택을 피하고 회화 자체에 집중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이다.
Work88-LW
1988, 캔버스에 화지와 잉크, 225*1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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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1926-2013)》
: 1926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출생한 권영우는 해방 직후 박노수, 서세옥과 함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기로 입학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서구의 추상미술을 수용하는 화단의 맥락 속에서 초기에는 수묵으로 필선을 강조하며 구상적인 추상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하다가, 1960년대 이후 부터는 붓과 먹의 사용에서 벗어나 한지를 활용한 작업을 전개했다.
한지를 붙이고 구멍을 내는 작업을 통해 한지라는 재료의 물성을 실험하는 그의 <무제>연작은 자연 그 자체로써의 추상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자신의 작품 제목을 줄곧 '무제'로 칭하는 권영우는 "조물주는 만물은 만들었지만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자연 그 자체가 곧 추상이다."라고 말하며, 특정한 대상을 상기시키기보다는 그저 자연에서 자시이 발견한 것들을 동양적 재료인 한지를 할용하여 제시하는 것에 그친다. 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 대신 자신의 손과 직접 제작한 도구를 이용하여 종이를 찢고, 붙이고, 구멍을 내는 권영우의 물리적인 작업방식은 신체적 행위와 종이가 지닌 고유한 물질성이 결합되며 그 만의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성한다.
무제
1987, 한지에 과슈와 잉크,227*1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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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옥(1929-2020)》
: 서세옥은 1950년대 파격적인 수묵 추상 작업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이다. 개화파 독립운동가인 서장환(1890-1970)의 아들이기도 한 서세옥은 해방된 이후 친일화가들이 장악한 미술계를 보며 왜색풍과 국전의 보수성에 반대하며 수묵에서의 청년 정신을 기치로 내건 '묵림회'를 결성했다.
현대미술가 서도호와 건축가 서을호의 아버지이기도 한 서세옥은 수묵의 특징인 풍부한 번짐과 농도를 담백하게 드러내며 새로운 수묵 추상을 구축했다.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해 추상성과 단순성을 토대로 현대적인 동양화를 실험한 서세옥은 1970년대부터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귀의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전개했다.
서세옥이 평생에 걸쳐 그리고 있는 주제는 '사람'이다. '사람', '두 사람', '춤추는 사람들', '거꾸로 보는 사람' 등의 제목이 붙여진 그의 작품들은 반복되는 형상이 간결해 보이지만 형상 안에는 사람 간의 유대와 역동성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사람들>은 어깨동무를 한 듯 이어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얽히고 설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공동체적 운명을 표상하고 있다.
사람들
1990년대, 한지에 수묵, 260*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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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1936~)》
: 일본의 획기적 미술운동인 모노파의 창시자이자, 동양사상을 통해 미니멀리즘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평가받는 이우환은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우환의 작품에는 동서양의 철학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화면에는 안료와 돌가루가 혼합된 최소한의 '점'과 그 점에서 이어지는 '선' 만이 존재한다. 이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최대한의 세계와 관계하고 싶다는 작가의 이론적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작가는 여백과 형상 간의 긴장 관계를 통해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이우환의 작품은 크게 선, 점, 바람 조응 시리즈로 나눌 수 있다.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는 흰 캔버스 바탕에 파란색 선들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그어가면서 그 흔적을 담고 있다. 굵기와 형태가 거의 동일한 선들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선명한 푸른색은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차 그 자취가 희미해진다. 이러한 선은 완성된 결과 보다는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 내제된 본질적인 의미를 부각시킨다. 단순한 선 긋기의 행위를 넘어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민의 결실이자, 마음을 비우고 선을 긋는 일회적 행ㅇ위를 반복함으로써 무위자연의 상태에 가까워지려는 시도인 것이다.
한편 이우환은 1980년대 이후 <바람과 함께> 연작을 발표하며 기존 시리즈보다 더 자유롭고 역동적인 화폭을 보여준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바람과 함께>는 일정한 방향이 없는 붓질을 통해 무작위로 불어대는 바람의 속성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에너지와 생명력이 이우환의 철학적 해석으로 재탄생했다.
바람과 함께
1989, 캔버스에 안료, 227.3*181.3cm
선으로부터
1978, 캔버스에 유채, 162*130cm
·수집가의 문장·
: 이우환은 많은 미술품 수집가들이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우환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몇 번을 보아도 제 눈에는 그저 푸른 선만 보일 뿐 아무 것도 느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식당에서 이우환 화백과 우리나라 초대 문화부장관이셨던 故이어령 선생을 만나 두 분이 대화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동양 철학을 전공한 이우환 화백과 독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던 이어령 선생이 인간의 삶과 영적인 세계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듣다보니 그제서야 제가 그림을 잘못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 길로 화랑으로 가서 이우환의 그림을 다시 마주했습니다. 무언가를 봐야만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명상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오랜 시간 보았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화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제가 그랬듯, 누군가는 이우환의 작품을 두고 선 하나 그은 것이 무슨 예술이냐고 하겠지요. 그러나 완전한 비움에 이르러 참된 고요를 마주해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 이우환 예술의 핵심이자 나아가 우리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미술관에 오신 여러분도 일상에 지친 마음을 비우고, 예술과 함께 영혼이 가득 채워지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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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1929-2021)》
: 1929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어려서부터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우며 회화를 접했고, 광성보고 시절에는 외삼촌에게 데생을 배워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월남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고, 1957년 친분이 있던 화가들과 함께 '한국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서구의 전위적인 미술을 수용하는 데 앞장섰다.
'물방울 작가'로 알려진 김창열은 극사실적인 필치로 그러낸 물방울 이미지를 통해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환영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활동할 당시 우연히 캔버스 뒷면에 맺힌 물방울에서 모티브를 얻은 김창열은 마대에 물방울이 몰려있는 <물방울(Water Drops)>연작, 천자문 위에 물방울을 그린 <회귀(Recurrence)>연작을 선보였다.
김창열의 화면에서 물방울은 거친 표면 위에 알알이 놓이거나 스민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현상과 본질의 신비를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작가는 거친 표면을 가진 지지체의 즉물성을 살리면서 동시에 이러한 표면에 맺힐 수 없는 영롱한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그려 바탕과 이질감을 형성한다. 김창열은 물방울을 일컬어 '아무것도 아닌 것', '무색무취하고 뜻이 없는 것'이라 말하는데, 그렇기에 김창열의 물방울은 동시에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으로 통한다.
회귀 SH930001
1993, 마포에 유채, 250*151cm
회귀 SH2000-04
2000-2004, 마포에 유채, 227*182cm
물방울 SH87032
1987, 캔버스에 한지와 아크릴, 190*300cm
회귀 NSI91001-91
1991,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7*333.3c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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