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시회를 다니며 기록을 남기고자
만들게 되었습니다.
전시회를 방문하기 전, 참고하셔도 좋고
못 가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장 내 작품들은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오디오가이드🎧 내용도 같이 올렸습니다.
🎧#1. 자크 빌레글레 - 정치적 알파벳들🎧
: 60년대의 예술가 인생의 반환점을 맞은 빌레글레의 작업은 정치 덕분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곳은 바로 파리 지하철의 밑바닥, '레퓌블리크역'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어떤 독특한 그래피티를 통해 사회정치적 알파벳이 우리의 집단적 현실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명의 흔적들이 평범할수록, 그것들을 찾아내 수집했던 빌레글레는 1969년경 <사회정치적알파벳>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알파벳은 간단한 원칙에 의거하는데요. 각각의 라틴어 글자에 그것과 닮은 실루엣을 가진, 전철의 색들, 벽보들이나 벽돌 위에 표시되어 있는 기호들을 하나 혹은 여러 개 더하거나 대체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삶에서 끌어온 기호들은 해독해야 할 문장들의 형태로 다시 벽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시에서 소개되는 것처럼 큰 규모의 스텐실로 또는 예술을 자극하는 조각의 형태로 새겨졌습니다. 벽보들과 기호들을 발견하고 수집하면서, 빌레글레는 실제 세계와 예술 세계가 서로 뒤섞이게 만들었죠. 자크 빌레글레는 점점 글 쓰는 작업으로 향했고, 가장 규모가 큰 사회정치적 알파벳 작업에 힘을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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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ourloupe (우를루프)】
뒤뷔페는 우를루프(1962-1974) 연작을 통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그 어떤 요소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평행하고도 기발한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러한 시도는 쿠쿠 바자 퍼포먼스를 정점으로 끌어올렸고, 조형과 건축을 위해 회화적인 공간을 점차 줄여갔기에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도전이었다.
이 연작은 1962년에 그려진 드로잉과 그림으로 시작되었다.
공간을 살리는 요소는 이 작업의 근원적 부분에 기여하며 각 개체와 장소 그리고 상징들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충만과 공허, 존재와 비존재, 실제 하는 것 또는 상상에 속하는 것의 정당성에 대한 불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다. 1962년부터는 그림과 드로잉 작업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끊임없이 재생되고 반복되는 광란적 그래피즘, 줄무늬가 인상적인 획일적 글쓰기가 그러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미분화된 연속성과 풍부하면서도 고갈되지 않으며 끝없이 움직이는 것의 특성"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반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팔라조 그라씨의 감독의 초청으로 1964년 베니스 시에서 첫 시연을 진행하는데 동의했다. 뒤뷔페는 이 미공개 연작의 중요한 부분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열광했지만, 이 새로운 작품들이 조화를 깨트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관객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것들은 매우 우연적이고 논쟁적일 수 있고 관객에게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을 가능성이 다분한 기획이다."
그러나 뒤뷔페는 전시회의 성공으로 안심할 수 있었고 국제 언론의 폭넓은 평가를 받았다.
베니스 전시회에 이어 파리에서 두 개의 공동 전시회가 바로 열렸다. 하나는 평면적 그림으로 쟌느 부셰 갤러리에서 전시가 진행되었고 다른 하나는 구아슈 그림으로 클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열렸다. 뒤뷔페는 이 두 전시를 위해 포스터를 제작했고 다른 작업과 마찬가지로 서체 디자인과 드로잉의 관계를 논하며 작업하였다.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전시회 포스터
팔라초 그라시, 베니스, 1964년 6월-9월
옵셋 인쇄, 93*65cm
🎧#2. 베니스 전시회🎧
: 이 연작은 1962년 드로잉과 그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뒤뷔페는 이 연작의 그림과 드로잉을 엄청나게 많이 작업하였는데요. 뒤뷔페에게 이 연작은 각 개체와 장소, 상징들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충만과 공허, 존재와 비존재, 실존하는 것과 상상 속 투영에 포함되는 것의 정당성에 대한 불확실한 감정과 같은 정과 반이 함께하는 상황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우를루프 작업에서 이러한 반전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한 뒤 대중에게 즉시 공개하지는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팔라조 그라씨의 감독인 파울로 마리노티의 간곡한 초청으로 1964년 베니스 시에서 첫 전시를 개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며 이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정하죠. 새로운 공간인 팔라쪼 그라씨 극장에 첫 선을 보인 이 전시회에서는 1963년과 1964년에 제작된 100여 점의 작품을 공개하였습니다.
뒤뷔페는 이 미공개 연작의 중요한 부분을 드디어 세상에 내놓는다는 생각에 흥분했지만 또 동시에 이 새로운 작품들이 조화를 깨트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시는 대성공이었죠. 그래서 빠르게 안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작품들은 비엔날레에도 거의 동시에 발표되었는데 국제 언론의 폭넓은 논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와 그의 아내 릴리를 위한 "호쾌한 성격의 파울로 마리노티가 선사한 며칠 간의 활기찬 축하 행사"가 되어 주었던 것이죠.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전시회 포스터
잔느 뷔세 갤러리, 파리, 1964년 12월 8일-1965년 1월 31일
3색 오프셋 인쇄, 실크스크린
🎧#3. 파리에서의 두 번의 전시회🎧
: 베니스 전시회에 이어서, 즉시 파리에서 두 개의 공동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하나는 평면 회화로 쟌느 부셰 갤러리에서, 다른 하나는 구아슈 그림으로 클로드 베르나르 갤러리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뒤뷔페는 자신의 전시회의 포스터를 위한 드로잉과 서체를 직접 고르고 그렸는데요. 파리에서의 두 전시를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모든 기획에 참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베니스 전시회 포스터를 보시면 그림 같기도 한 손글씨로 직접 서체를 만들어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두 파리 전시회 포스터는 보시다시피 캘리그라피 느낌의 폰트가 아닌 기계적 폰트를 사용한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를루프-장 뒤뷔페의 고무수채화법 전시" 전시회 포스터
클로드 베르나 갤러리, 파리, 1964년 12월-1965년 1월
3색 오프셋 인쇄
기억의 사슬 Ⅰ
1964년 10월 28일, 종이에 비닐, 콜라주
🎧#4. 기억의 사슬🎧
: 우를루프는 프랑스어로 '소리지르다 attraper', '새가 지저귀다 gazouiller', '늑대 loup' 라는 세네가지 단어를 조합해 뒤뷔페가 만든 신조어입니다. 화가 본인의 일상 속 사물들을 검은색 굵은 테두리 안에 비정형, 추상화된 형태로 뒤섞어 표현한 뒤 흰색과 붉은색, 파란색으로 색을 채워넣는 양식입니다.
우를루프 양식은 어느 날 뒤뷔페가 전화통화를 하면서 무심코 볼펜으로 그렸던 낙서에서 출발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우를루프 연작에서는 어린이의 그림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뒤뷔페는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우를루프 연작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의 예술을 보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게 여기고 평행하지만 기발한 세계를 재창조하였습니다.
우를루프 연작은 쿠쿠바자 퍼포먼스를 통해 정점에 올라갔으며 이 시도를 통해 조형과 건축을 위해 회화적인 공간을 점차 줄여나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상천외한 도전이라고 받아들어졌습니다.
포스터 프로젝트, 런던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ICA)에서 열린 전시를 위해
1966년 2월 2-9일, 종이에 비닐 (EG158)
포스터 프로젝트, 런던 테이트 갤러리 전시를 위해
1966년 2월 9일, 종이에 비닐 (EG160)
포스터 프로젝트, 런던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ICA)에서 열린 전시를 위해
1966년 2월 10일, 종이에 비닐 (EG161)
추정상의 장소 (동물, 나무들과 인물들)
1966년 3월 15일, 캔버스에 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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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바자-애니메이션 작품】
1971년에는 애니메이션 그림의 장식으로 사용할 오려낸 그림을 만들기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 목적으로 만들어진 뒤뷔페의 드로잉 슬라이드는 대형 판넬에 전시되었고 이는 작가가 원하는 전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구현하기 위해 뒤뷔페는 1971년부터 파리 근처의 카르투셰리 드 방센느에 작업장을 열었다. 그의 조수들은 그 곳에서 관객을 위한 무대 실물 장치, 페인트 및 모빌 절단기를 구성한 대형 패널을 작업했다. 또한 뒤뷔페는 다양한 재료로 의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몇 주 전부터 저는 가면을 만들고 있습니다. 현재 작업 중이기도 한 연극 의상 보완을 위해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내가 우를루프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연극용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연극의 모든 장식과 음악, 노래, 그리고 가사와 춤 등 모든 것을 직접 구성하고 싶습니다."
쿠쿠 바자(우를루프 축제 또는 환상 무도회라는 타이틀이 붙음)는 이 프로젝트에 주어진 제목이다. 이는 1973년 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그 다음 같은 해 가을에 전시에 부여될 제목이었다. 세 번째 버전은 F.I.A.T.의 도움으로 몇 년 후인 1978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소개될 예정이었다.
뒤뷔페는 이 연극을 다음과 같이 여겼다.
"회화와 애니메이션이 발전한 것처럼 이것은 단순히 보기만 하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실제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시나리오가 없는 이 연극은 한 시간 동안 별다른 시작과 마지막 장면 없이 진행된다. 구성 요소(플랫폼 및 의상)들은 매우 천천히 정면으로 이동하여 다양한 평면의 움직임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일련의 애니메이션과 같은 조합을 만든다.
환하게 빛나는 고독 (계획된 그림)
1974년 10월, 캔버스에 비닐
가벼운 브리스톨 종이에 매직펜 (유색)
(크래프트 종이에 절단과 부착)
(실현 가능한 모형)
1. 연극 의상Ⅰ(해군준장), 1971년 5월 16일
2. 등장인물(필륄르 교수 모형), 1971년 5월 16일
3. 개, 1973년 3월 5일
4. 개(옆모습), 1973년 3월 26일
5. 사자, 1971년 3월 28일
6. 나무를 들고 있는 사람, 1972년 1월 24일
방랑자(실현 가능한)
1973년 3월, 폴리우레탄 폼에 아크릴릭 회화
회고전과 '쿠쿠 비자'공연을 위한 포스터
솔로몬 R,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1973년 4월-7월
석판화
위) 회고전과 '쿠쿠 바자' 공연을 위한 포스터
그랑 팔레의 내셔널 갤러리, 파리, 1973년 9월 28일-12월 31일
잘린 석판화
아래) 회고전과 '쿠쿠 바자' 공연을 위한 포스터
그랑 팔레의 내셔널 갤러리, 파리, 1973년 9월-12월
석판화
Praticables 실현 가능한 모형
🎧#5. 쿠쿠바자 코스튬 및 전체무대🎧
: 뒤뷔페는 '쿠쿠바자'라는 이 한 편의 공연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회화와 애니메이션이 발전한 것처럼, 그것은 단순히 보기만 하는 이미지에 그치지 않으며 실제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당신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쿠쿠바자는 무엇보다도 철학적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
공연은 한 시간동안 시나리오나 별다른 시작과 끝이 없이 진행됩니다. 공연의 요소, 그러니까 무대나 의상 백드롭 같은 것들은 매우 천천히, 거의 정면으로만 이동하며 다양한 평면이 움직이거나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는 등 애니메이션의 장면들과 같은 조합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작품 전체에 고유한 생명력을 부여하여 고정된 요소와 움직이는 요소 사이에 일종의 혼동을 초래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니니 라 미노드 / 병사
클로슈포슈
1973, 폴리우레탄에 채색된 폴리에스터
🎧#6. 쿠쿠바자 조각🎧
: 1966년 뒤뷔페는 발포 폴리스티렌이라는 물질을 발견하여 조각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1974년 스티로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된 발포폴리스티렌은 탄력성이 우수하며, 파손의 우려가 적어 취급이 용이하고 가격이 저렴한 것이 특징인데요. 여러분이 아시는 그 스티로폴 맞습니다.
그는 1967년부터 오직 <기념물과 주요건물의 형체를 가질 때까지 확장하는> 채색된 조각품을 만드는데 전념하기 위해 빠르게 그림을 포기하였습니다. 채색된 조각 및 건축 모형과 같이, 뒤뷔페는 1971년에 애니메이션 그림의 장식으로 사용할 오려낸 조각 그림들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작가의 드로잉 슬라이드는 대형 판넬에 전시되며 작가가 원하는 수준의 드로잉 작품으로 작가의 제작 의도 사실 그대로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대한 프로제그를 구현하기 위해 1971년부터 파리 근처의 카르투셰리 드 방센느에 작업장을 열었습니다. 그 곳에서 조수들은 관객들을 위한 무대 실물 장치, 페인트 및 모빌 절단기를 구성한 대형 패널을 작업했습니다. 뒤뷔페 또한 다양한 재료로 의상을 제작했습니다.
"FIAT 제공 장 뒤뷔페" 전시와 쿠쿠 바자의 공연을 위한 포스터
발렌티노에서 예술의 촉진을 위한 건물, 토리노
1978년 6월 16일-7월 15일까지
🎧#7. 쿠쿠바자 피아트 포스터🎧
: 쿠쿠 바자는 우를루프 축제 또는 Bal des Leurres(발 데 뢰르)
즉, 환상 무도회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프로젝트의 타이틀로, 당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톰 메셔가 뒤뷔페에게 1973년 봄과 가을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회고전에서 이 작품을 선보이라는 제안을 받으며 탄력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 포스터는 세 번째 버전입니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회사 피아트의 도움으로 몇 년 후인 1978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전시이자 공연으로 다시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FIAT 제공 장 뒤뷔페" 전시와 쿠쿠바자의 공연을 위한 포스터
발렌티노에서 예술을 촉진을 위한 건물, 토리노
1978년 6월 16일-7월 15일, 스크린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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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빌레글레와의 만남】
뒤뷔페가 그의 CNAC에서의 전시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는 훗날 퐁피두 센터가 세워지는 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 자크 빌레글레는 동네를 산책하다가 장 뒤뷔페의 포스터를 발견했다.그는 자신의 '비회화속의 회화'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그의 포스터 한 장을 떼어냈다. 그는 1975년 2월과 12월 사이에 제작된 40여개의 찢어진 포스터를 제작하며 뒤뷔페의 뒤를 이을 새로운 인물이 된다. 이 포스터는 빌레글레가 10년 후인 1985년 렌느 도시의 문화회관에서 <우를루프의 귀환>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하게 된다.
빌레글레가 파리 거리에서 우를루프적인 인물을 찾고 있을 때, 뒤뷔페는 '도시의 신화'라는 실험 영화의 대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빌레글레의 포스터는 영화의 중심축 중 하나가 되며 두 작가의 10년 서신교환의 시작점이 된다.
자크 빌레글레, 도시의 신화
1974-2002, 콜라주가 있는 판자
(위에 언급된 뒤뷔페의 도시의 신화 영화 작품은
영상 촬영을 하지 않았으며
작품의 오디오 가이드가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
작품 설명 및 오디오 가이드 글만 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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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뒤뷔페, 도시의 신화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파리
16mm필름, 컬러, 러닝타임 29분
🎧#8. 도시의 신화🎧
: 빌레글레가 파리 거리에서 소위 '우를루프적인 인물'을 찾아다니던 시절, 장 뒤뷔페는 지금 보시는 이 작품인 '도시의 신화'라는 실험 영화의 대본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뒤뷔페의 포스터 속 작은 인물을 따 와서 작업 속에 넣는 아이디어는 뒤뷔페의 허락과 함께 그의 작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빌레글레의 간접적 포스터는 영화의 중심축 중 하나가 되었고 이로 인해 두 작가가 10년간 서신을 주고받는 시작점이 됩니다. 20여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좋은 동료로서, 동지로서, 또 친구로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장 뒤뷔페: 카스틸라의 풍경-삼색의 지역> 전시 포스터
파리 컨템포러리 아트 내셔널 센터 (CNAC)
1975년 2월-3월, 실크스크린
자크 빌레글레, 모리스 컹탕 광장
1975년 4월 4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9. 자크 빌레글레와의 만남🎧
: 뒤뷔페가 그의 국립예술문화센터에서의 전시를 위해 디자인한 포스터는 미래에 퐁피두 센터가 들어설 지구에 굉장히 많이 붙어있었습니다. 이 시기, 자크 빌레글레는 동네를 산책하다가 장 뒤뷔페의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빌레글레는 자신의 '비회화 속이 회화'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그의 포스터 한 장을 뜯어 가져갔습니다.
이후 빌레글레는 1975년 2월과 12월 사이에 제작된 40여개의 찢어진 포스터를 제작하며 뒤뷔페의 뒤를 이을 새로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포스터는 빌레글레가 10년 후인 1985년에 헨느 도시의 문화회관에서 '우를루프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습니다.
빌레글레는 인류학자처럼 찢어진 벽보들, 겹겹이 기억들 속에서 세상의 표정을 보는 화가였습니다.
벽보와 정치적 그래피티들이 그의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프랑스의 동요했던 역사, 캠페인들, 6.8혁명과 같은 혁명들, 선거 캠페인과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계속된 갈등의 증거물이었으니까요. 벽보들은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사진으로, 잡아 찢기에서 스프레이를 이용한 그래피티 낙서로 변했고, 벽보들과 메시지 사이의 엉뚱한 결합에 의해 반체제적이고 공격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이고 때로는 해학적인 작품들로 탄생하였습니다.
자크 빌레글레, 까르푸 몽마르뜨-렁뷔토
1975년 4월 12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는 삼색의 경치 (계획된 그림)
1974년 8월, 캔버스에 비닐
앉아있는 남자가 있는 경치 (계획된 그림)
1974년 12월, 캔버스에 비닐
🎧#10. 앉아있는 남자가 있는 경치 계획된 그림을 위한 회화🎧
: 프로젝터(또는 투영기)를 사용한 작업은 뒤뷔페 본인이 아닌 조수들이 캔버스에 작업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프로젝터는 그가 직접 최종 단계에서 캔버스를 칠할 때보다 드로잉에 담긴 펜의 특정 효과를 더욱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뒤뷔페는 이 과정을 전혀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작가가 직접 터치한 캔버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죠. 그러나 뒤뷔페는 이를 두고 "사용된 기법에 따라 작품이 평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궁극적으로 어떠한가 이다.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작업의 미덕과 아무 상관없는 전문가들의 부차적인 부분과 물신숭배를 보여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최근 많은 화가들이 이 방법으로 스케치를 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가 이 방법으로 작업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었습니다.
새가 있는 경치 (계획된 그림)
1974년 9월, 캔버스에 비닐
계획된 그림을 위한 회화
매직펜(유색), 종이에 연파란색 비닐(재단되고 부착된 요소들)
1. 공장의 출구 , 1974년 7월 21일
2. 소풍가는 사람 , 1974년 8월 2일
3. 시골에서 걷기 , 1974년 7월 19일
4. 산책하는 커플 , 1974년 8월 4일
5. 전원 산책 , 1974년 8월 6일
6. 바캉스중인 사람들 , 1974년 8월 4일
7. 앉아있는 남자가 있는 장소 , 1974년 8월 31일
시골에서 걷기
1974년 7월 19일
노란 종이에 매직펜(검정), 흰 종이에 매직펜(유색)
종이에 파란색 비닐(회식 종이에 재단되고 부착된 요소들
🎧#11. 회화로의 회귀🎧
: 1974년 작가는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큰 획을 그은 우를루프 연작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기념비적인 조각 프로젝트와 그의 쇼 '쿠쿠바자'의 제작에 몇 년을 바친 뒤, 1975년 파리 국립예술문화센터 (통칭: 조르주-퐁피두 센터)에 전시된 카스틸라 풍경과 삼색 지형 시리즈 작업을 하며 1967년 이후 하지 않았던 회화로 복귀하였습니다.
회화로 복귀하며 뒤뷔페는 "이 그림으로 지난 12년에 걸쳐 이어진 우를루프의 방황이 확실히 끝났다. 나는 오랫동안 이 허상의 세계를 즐겼지만 현재는 더욱 단단한 땅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장 뒤뷔페는 우를루프 연작 중 "백조의 노래" 이 작품으로의 회화로 복귀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 크기 뿐만 아니라 화가가 붓질을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도 굉장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투영에 의한 확대 과정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려진 드로잉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쿠쿠바자 플랫폼의 경우 프로세스가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라면 이는 의도적인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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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빌레글레】
1947년 아직 학생이었던 빌레글레는 생 말로에서 바캉스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쇼세 데 코르새르'라는 바닷가 길을 산책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들에 의해 건립된 대서양 방벽의 폐허에서 나온 '강철의 후예' 두 조각을 주웠다. 그것을 나란히 놓고 보면서 그는 '공간 속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 조각은 현재 퐁피두 센터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의 친구 레이몽 앵스가 1960년에 발표한 선언문보다 훨씬 앞서 만들어진 누보 리얼리즘의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
친구 레이몽 앵스와 미완성 영화 페넬로페와 함께 실험적인 영화를 시도한 후, 빌레글레는 물건과 스크랩 수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브제와 쓰레기 수집을 다시 시작했다. 1949년부터 도시 벽보가 만드는 기호들, 이미지들, 색들은 그의 스크린에서 살아있는 작품이 되었다.
언제나 새롭고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벽보는 완벽하고 풍부한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초기에는 친구인 레이몽 앵스와 함께 벽보들을 떼어냈다. 후에는 혼자서 벽보들을 떼어내는 '유괴'를 계속 했다.
<찢어진 벽보>, <말들>, <이미지들>, <글자도 인물도 없음>, <정치적> 또는 <비(非)회화 작품 속 회화>
하지만 작품들을 직접 연작으로 기획한 뒤뷔페와 달리, 빌레글레 작품들 전체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연속성을 띄진 않는다. 반대로 주제들은 동시에 공존하며 아침에는 '말들' 벽보를, 저녁에는 추상적 벽보를 찾으며 자유롭게 작업했다. 이렇듯 그는 하나의 형식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거나 마음대로 미적인 카테고리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구성에 관심을 가졌다. 후에는 단어나 단편적 문장에 관심을 가지고 벽보들을 선택했다. 1960년대에는 색깔과 무늬를 위해서 벽보 도안가들과 함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기도 했다.
페넬로페 1953
레이몽 앵스&자크 빌레글레
자크 빌레글레가 조수와 함께 최면경으로 촬영한 마지막(미공개)시퀀스
16mm필름, 무성, 러닝타임: 2분 14초
🎧#12. 페넬로페🎧
: 레이몽 앵스는 빌레글레의 절친한 친구로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 초까지 유익한 예술적 협업을 함께 하였습니다. 첫 번째 공동 프로젝트는 실험적 추상 영화 제작 이었는데요. 빌레글레는 영화 제목을 '페넬로페'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해학적인 제목이었다고 하네요. 앵스는 빌레글레가 낮 동안 만든 것을 페넬로페가 밤 동안 해체한다고 덧붙이면서 그 제목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1950년대에 시작해서 1954년에 중단되어 미완성의 상태로 남았으나, 오늘날 대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 작업에서 두 젊은 예술가는 회화를 그림 이상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리듬을 부여하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시각 장치인 카메라에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에 세로로 길게 홈이 파인 특수렌즈, 즉 최면경을 붙였습니다. 이 최면경은 앵스에 의해 구상되었고 빌레글레가 그림을 그려서 발전시켰습니다.
'페넬로페'는 고인 물, 항구와 운하의 반영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색들을 욕조에 담아둔 것처럼 보이는 추상적 구성 작품입니다. 물결치는 윤곽이나 삼각형 모서리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간소한 퍼즐 모양 등의 다채로운 형상들이 불규칙적으로 세로로 파인 홈의 반복적 움직임에 의해서 상호 침투하면서 형성되는 모습이죠.
그러나 이 작품은 미완의 걸작으로 남았고 이후 빌레글레는 '페넬로페' 작업을 그만둔 후 오브제와 쓰레기 수집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철의 후예-소세데 코르새르(생-말로)
1974년 8월, 강철과 목재
(작품원본: 국립현대미술관-조르주 퐁피두센터 소장)
🎧#13. 강철의 후예🎧
: 1947년 당시 빌레글레는 아직 학생이었는데요. 방학을 맞아 생 말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우연히 '쇼세 데 코르새르'라는 바닷가 길을 산책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들에 의해 건립된 대서양 방벽의 폐허에서 나온 철사 조각, 즉 '강철의 후예' 두 조각을 주웠다고 합니다. 그는 주운 두 조각의 철사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공간 속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조각이 아닌 '공각 속 그림'이라 표현한 것이 재밌는데요. 그 조각은 현재 퐁피두 센터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레이몽 앵스가 1960년에 발표한 선언문보다 훨씬 앞서 만들어진 누보 리얼리즘의 첫 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자크 빌레글레와 함께 언급되는 예술가 레이몽 앵스에 대해 설명 드리자면, 레이몽 앵스는 프랑스의 저명한 시각 예술가이자 자크 빌레글레와 함께 누보 리얼리즘 운동을 창시한 예술가입니다. 누보 리얼리즘은 이들이 주창한 1960년대 초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나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진 전위 미술 운동이죠. 추상 미술의 지나치게 추상적인 견해에 대해 반대하여 생긴 미술 사조입니다.
몽파르나스 대로
1950,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게시판에서 절도
1957년 3월, 찢어진 벽보를 나무 위에 부착
생 마르탕 거리
1959년 9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생-세노슈 거리
1959년 12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왼) 루 누벨-생피에르
1962년 6월 25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오) 콩스텅티노플 거리
1962년 5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생 세노슈 호텔 - 바옌 거리
1963년 3월 31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생 폴 거리
1965년 6월 5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왼) 롱-푸앙 드 라 데팡스
1965년 8월 17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오) 옵세르바투아 대로
1961년 11월 7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성당 거리 - 브륀느
1965년 3월 14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성당 거리
1968,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위) 베르탱 푸아레 거리
1969년 8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아래) 라 캉티니 거리
1972년 7월 4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그라빌리에 거리
1973년 1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세바스폴 대로 52번지
1987년 7월 20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미쉘 르 콩트 거리
1980년 9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아멜로 드 사이우 호텔
1981년 4월 14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레오뮈르 거리 - 베르튀 거리
1984년 6월 4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이씨-레-물리노
1991년 3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바르셀로나 - 사그라다 파밀리아
2000,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캥페르 사람들의 작업 - 펜아르 수영장 - 르 카르티에
2006,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14. 캥페르 사람들의 직업🎧
: 1980년대부터 사회가 변하고 자동화된 벽보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벽보들은 변화했고, 도시에서 점점 사라져갔죠. 점점 자크 빌레글레는 파리 시내를 떠나서 도시 외곽, 교외 지역, 게다가 지방까지 가야만 벽보를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프랑스를 포함, 전 세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7년부터 우리나라 하이텔, 나우누리 같은 프랑스의 PC통신 미니텔에서 에로틱한 메시지 서비스들이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섹스와 록의 시대로 벽보들은 더욱 터무니 없어지고, 공격적이고, 폭발적이며, 열광적이었습니다. 장난스럽고 경박하기도 하고요. 비디오 광고들은 TV의 스크린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를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시대가 종결되며 사회적 변화도 일어났습니다.
빌레글레는 더 이상 1950년대부터 하던 작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이 벽보를 이용한 작업은 예술가 빌레글레의 초기 작품을 구별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65세가 가까웠을 때, 최신 인기 음악과 예술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초창기 재료들은 줄어들고, 찢어진 벽보들은 파리에서 점점 희귀해졌습니다. 그것을 뜯어내는 것도 예술가에게 육체적으로 더 고단한 일이 되었죠. 2006년 그는 마지막으로 데콜라주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고향 캥페르의 르 카르티에 아트 센터에서 80번째 생일을 맞아 회고전을 준비하던 중, 그는 여러 형광빛 그의 초상이 있는 벽보 한 장이 선거 광고판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빌레글레는 동네 주민들에게 이 벽보를 찢으러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그는 그 결과물로 자신의 최종 캠페인 <데콜라주>를 기획한 것을 스스로 감탄하였다고 합니다.이로 인해 '찢어진 벽보 최종 시리즈' <캥페르 사람들의 작업> 40여점이 탄생했고, 그 작품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술가의 <초상화>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 사진 속 빌레글레의 장난끼 가득한 웃음은 그의 작품 속에 네 가지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브리-쉬르-센느
1989년 11월 27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릴-루배 거리
1991,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라파예트 거리 / 오트빌 거리
1988년 4월,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갤럭시
1987년 5월 18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성당 거리 99번지
1974년 5월 19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파스투렐르 거리
1972년 4월 23일, 찢어진 벽보를 캔버스에 풀로 부착
아트
2010-2011, 녹슨 청동
"벽보 강탈자로서 나의 포부는 회화적이고 시적인 작품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이는 악천후에 의해서, 혹은 미학적 의도 없는 성질 급한 사람들의 제스처에 의해서 우연히 간접적으로 나타난 광고 매체를 부각시킴으로써 달성된다. (···중략) 도시의 쓰레기들을 전문 아티스트들이 창조한 형태들과 동등하게 놓는 것이 바로 나의 야망이란 것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내가 찢은 것들이 분산과 발산의 악마, 무엇에나 손 대려는 존재인 그 악마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충분히 풍부하고 다양하며 가변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크 빌레글레-
🖼️
【장 뒤뷔페의 1940년대】
뒤뷔페의 '물질적 기억' 앨범에 포함된 1944년 석판화 시리즈는 커피 그라인더, 전화의 고통, 코를 푸는 사람 등과 같이 평범한 사람의 주제들을 다룬다.
"만약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본질적인 사소한 행동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중략) 별안간 독창적이고 감동적인 것이 나타날 것이다."
<적나라한(1945)>과 같은 작품은 또한 그에게 열망적 동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
"나는 어린 아이들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다. 인생 처음으로 새하얀 카드 위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는 <모나리자(1948)> 그림의 표현처럼 상징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당시 흔하던 틀에 박힌 풍으로 그리는 그림에 대한 거부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적나라한
1945년 6월, 캔버스에 유채
🎧#15. 적나라한🎧
: 가족의 사업인 와인 무역 사업을 하던 중 뒤뷔페는 1942년 다시 예술가로 복귀하게 됩니다. 복귀 후 그는 스스로 원시 미술과 같다고 생각한 아르브뤼트 작품들을 그야말로 쏟아냈습니다. 그에게 화가로서, 아르브뤼트 화가로서의 열망적 동기를 일으킨 이 작품은 그래서 그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사람 몸이 마치 도로를 가로지르는 듯한 색채로 표현된 누드화로, 그의 초창기 작품 중 중요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기, 그는 스스로를 아마추어라고 표현하기 좋아했다고 합니다.
화보집을 위한 석판들
(왼쪽부터)
1. 자전거 여행
2. 암소#2
재료와 기억 또는 학교에서 석판
1944 종이, 오베르뉴
'페르넝 물로' 출판, 파리, 1945
🎧#16. 화보집을 위한 석판화들 문질과 기억 또는 학교에서 석판 시리즈🎧
: 뒤뷔페는 자신이 1942년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들을 모두 선사시대 원시작품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초창기의 작품들 중 일부 작품은 보존하되 일부는 스스로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1942년 이후, 그는 마침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문화 기관에 대한 거대한 불안정화 사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좀 어렵게 느껴지실 텐데요. 무슨 뜻이냐면 '평범한 사람은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동적 측면을 상징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과 잘 그리는 것에 대한 상투적인 관습에 대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기분이 즉각적으로 발산이 되는' 예술의 이익적 측면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의지가 반영된 이 작품들은 뒤뷔페의 <물질과 기억> 앨범의 1944년 석판화 시리즈에 포함된 작품들이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의 주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왼쪽부터)
3. 왈츠 , 4. 새를 먹는 사람들
(왼쪽부터)
5. 교양있는 숙녀 , 6. 스윙 아가씨
(왼쪽부터)
7. 커피 그라인더 , 8. 전화의 고통
(왼쪽부터)
9. 타이피스트(Dactylographe)
10. 피아니스트
11. 코를 푸는 사람
모나리자 (여자의 큰 두상)
1948년 5월-6월, 캔버스에 유채
🎧#17. 모나리자🎧
: '모나리자'라는 작품명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에서 불려지는 명칭인데요. 원작의 이름은 그림 속 여성의 남편의 성으로 추정되는 '조콘드(Joconde)'입니다. 이 작품은 뒤뷔페가 모나리자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게 된 작품인데 1948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상징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당시 틀에 박힌 정규교육기관에서 배운 듯한 그림에 대한 예술가의 거부감을 솔직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부제는 '큰 머리의 여성'으로 기존 미술계의 소위 잘 그린 그림에 대한 작가의 비꼼이 느껴지는 제목입니다.
🖼️
【장 뒤뷔페의 1950년대】
1950년대 작품은 그의 재료와 질감에 대한 활발한 관심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뒤뷔페는 이 시기에 향후 작업에 새로운 차원을 선사할 다양한 재료들을 경험하는데, 석판으로 판을 만들고 두꺼운 덩어리를 분쇄하여 풍경을 수직으로 세운 후, 하늘의 얇은 부분만 드러내는 <유령들에게 월출, 1951>이라는 작품의 풍경을 만듦으로써, 이는 이후 땅과 지형이라 불리는 연작의 시작이 된다. 풍경들은 간혹 퍼티 나이프의 끝으로 긁은 물질의 혼합 재료 속 솟아 있는 인물들로 가득 찼다.(각자의 몫, 1956)
뒤뷔페는 또한 두꺼운 반죽으로 그려진 그림들과는 반대로 에나멜 페인트라는 산업 물감으로 평평한 그림들을 그리며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때로는 풍경을, 때로는 인물의 형태를 드러내며, 이 재료 특유의 건조 과정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금반지
1958년 4월 2일, 캔버스에 유채
🎧#18. 금반지🎧
: 1957년부터 뒤뷔페의 회화는 새로운 경험의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주 동기는 '큰 크기의 그림들로 땅을 찬양하고 기리는 연작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얇게 표현된 그림 속 하늘은 모든 공간을 맨땅의 한 표면을 연상시키는 질감으로 남기기 위해 곧 사라질 것처럼 표현하였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는 한 명이지만, 비슷한 다른 작품 속에서는 몇몇의 외로워 보이는 거인들이 약간 의아하게 작품의 전면에 돌발적으로 강하게 드러나도록 표현하였습니다.
모래 들판 (Texturologie) ⅩⅦ)
1958년 3월 20일, 캔버스에 유채
급류
1953년 8월, 캔버스에 유채
초록 모자를 쓴 남자
1954년 7월, 캔버스에 유채
🎧#19. 초록 모자를 쓴 남자🎧
: 뒤뷔페는 물감이 두껍게 올라가는 일반적인 유화 작품들과는 반대되는 에나멜 물감이라는 산업 물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에나멜 물감으로 유화의 덩어리짐이 없는 평평한 그림들을 그리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에나멜 물감은 시너를 안료로 사용하는 물감으로 색퍼짐이 좋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때로는 풍경, 때로는 이 작품과 같이 인물의 형태를 드러내는 작품에서 에나멜 물감을 사용하였는데, 이 재료의 특유의 건조 과정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돌처럼 차가운 여인
1950년 3월, 이조렐(하드보드지의 일종)에 유채
이끼가 자라는 풍경
1953년 6월-12월, 캔버스에 유채
유령들에게 월출
1951년 4월, 이조렐(하드보드지의 일종)에 유채
🎧#20. 유령들에게 월출🎧
: 1950년대에 들어서며 뒤뷔페는 재료와 질감에 대한 활발한 관심을 가지는 특징을 보이는데요. 1945년 당시 뒤뷔페는 예술 작품 수집가이자 마음의 연금술사로서 그의 작업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 줄 흙, 진흙, 실, 유리 등 예술세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마그마에 가까운 질감을 표현해내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석판으로 밑판을 만들고 두꺼운 덩어리를 분쇄하여 풍경을 수직으로 세워 하늘을 일부분만 드러내는 풍경을 만들어낸 이 작품은 이후 통상적으로 땅과 지형의 연작이라 불리는 첫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하드보드지에 구현된 작품으로 새로운 소재에 대한 작가의 열의를 보여줍니다.
뒤뷔페는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을 통해 생명의 움직임, 소우주와 대우주의 움직임을 지칠 줄 모르는 관찰자로서 '사물의 숨겨진 얼굴'과 그 깊은 본성을 끊임없이 예리하게 드러냈습니다.
각자의 몫
1956년 2월 22일, 캔버스에 유채
맨발의 지클로
1954년 6월, 캔버스에 유채 (assemblage)
돌 (망향의)
1959년 9월, 밀랍을 칠한 캔버스에 유채
구름이 걷힌 망루
1961년 5월 28-29일, 캔버스에 유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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