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시회를 다니며 기록을 남기고자
만들게 되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전시회입니다.
( ~2023.5.21까지)
전시회를 방문하기 전, 참고하셔도 좋고
못 가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장 내 작품들은 모두 직접 찍었습니다.
전시명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
(Beyond_The Centennial Exhibition of Guei-Hong WON)
관람 기간 및 관람시간
2023. 3. 16(목) - 2023. 5. 21(일)
화-일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성곡미술관 1관
도슨트
금,토,일: 오후 2시, 오후 4시
*오디오 가이드 없음
성곡미술관은 원계홍 화백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원계홍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흐릿하게 지워져 가는 그의 업적들을 다시 복원하여 알리기 위한 《그 너머_원계홍(元桂泓, 1923-1980)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개최한다.1940년대 초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간 원계홍은 경제학보다는 미술이 좋아 유럽에서 유학한 이노쿠마 겐이치로(Inokuma Genichiro, 1902-1993) 작가가 운영하는 사설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아뜰리에에 홀로 파묻혀 그림을 그리고, 일본에서 보고 배운 세잔느, 클레. 칸딘스키 같은 작가들의 미술이론 등 서양의 현대미술론을 스스로 파고들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일구기 위한 고독한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원계홍은 1978년 12월 공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이어서 화가로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간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을 열었고, 1980년 제3회 《중앙미술대전》에 초대 작가로 작품을 출품했다.이후 원계홍은 1980년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그해 12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원계홍의 나이 고작 57세 되던 해이다. 그의 안타까운 타계 이후 1984년 6월 서울의 공창화랑에서 원계홍 유작전이, 1989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원계홍 회고전이, 1990년 12월 공간화랑에서 유작전이 열렸으며, 이어서 오늘 성곡미술관에서 그의 전작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연다.이번 전시는 아카이브 자료와 함께 회화 작품 100여 점으로 구성되며, 평소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고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 관장과 오광수 미술평론가, 그리고 현대미술사가 인 김현숙 박사가 한국 현대미술사 속에서 원계홍의 위상을 확인하고, 그의 작품 세계와 그 가치에 대해 우리에게 피력한다.
-출처: 전시장 내 설명-
소녀 (A Girl)
1978, 캔버스에 유채
《원계홍 유작전》 포스터 (공창화랑, 1984)
Exhibition Poster, Gongchang Gallery, 1984
《원계홍 회고전》 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 1989)
Exhibition Poster,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1989
故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원계홍 회고전에 부쳐」 (1989)
굴뚝이 보이는 풍경 (Scene of an Alley with Chimneys)
197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빨간 건물 (Red Brick Buildings)
197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원계홍의 작가 노트 시리즈>
감동(感動)을 실감(実感) 하는 일의 중요성
: 실감의 과정, 감동을 회화의 '마티에르'(재질)로 이입시키는 일에 무상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 회화에 있어서의 모든 점이 실감된 질(質:바탕) 내용을, 즉 그것이 느껴진 것이며 감동의 등가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회화의 내용 인상이 확산되어가는 경우와 심상의 작용이 퍽 적극적이어서 더욱 선명해지는 수도 있다. 즉 시각적 체험에도 언짢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불길한 꿈과 같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내쫓으려고 한다. 회화의 내용이 갖는 특질이 좋은 인상이든 마음에 걸리는 성질이든 간에 그 특질이 예술적인 가치에 무언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점이다. 질(質) 내용을 소유하고 있는 정신력과 통합시킬 수가 있었다고 하면,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지 그것은 다만 그림으로서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 가치를 의심하고 그것이 세계에서 보편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지.
회화에 있어서 색채의 조화란 시각적인 감동이지만 그것은 3차원적 form(형)과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이어서 그 경우 우리는 마치 형(form)에 닿을 수 있는 것 같은 촉각적인 감동을 받는다. 또한 움직임의 환각마저 맛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어서 지성적도 아니고 반드시 상징적일 필요도 없다. 상징은 감각적은 아니고 정서적인 것이어서.
예술이란 항상 일종의 긍정 작업이어서 말하자면 경이(驚異)와 향수(享受)를 긍정하는 것이 된다.
기본적 형태, 색채, 선 등은 충분히 조직되어 명확히 한정된 심상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속할 것이라고 바라지만, 그 심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만 무엇이든 심상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구성적인 심상이 아니면 안 된다. 구성적인 심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내부에 생명을 강화시킬 힘이나 원망을 환기시켜 생존할 권리를 주장하며 그 이상의 발전을 조성하는 심상을 말한다.
몬드리안은 좋게 말해서 일종의 신비주의자로 자연을 싫어했다. 방 안을 순백으로 칠하고 조망을 없이 해놓고 생활했다. 개성을 미워하고 절대성을 순수를, 그리고 완전성을 믿고 있었다. 그는 예술에서 일체의 우발성을, 일체의 감성을 배제하는 것을 염원했다. 그는 완전측정(完全測定)의 예술을 탐내어 표현주의와 마주하는 위치에 있었다.
무의식과 아무런 관계를 가질 의사도 필요도 (...)
에샐래드 성인(聖人)은 모든 창조는 심정(心情)의 미각이라고 했다지만, 감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애정이 예술인 것이다.
망집적(妄執的: 헛된 생각을 버티지 못하는)인 지배나 혹은 탈예술적인 공리공명(功利功名) 같은 것을 동기로 한다면 결국은 감각적인 소모, 불모의 생태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구제(救濟)를 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 구제라고 하는 것이 예술의 과(果)한 주요한 기능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리드도 언제나 예술에 있어서 구제를 구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예술이 염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존재의 과정을 강조하는 것. 일생을 인간의 숙당이 갖는 의의를 단호히 주장하는 것. 만약 이것이 없었더라면, 있는 것은 다만 허무주의, 다양한 형색의 자기기만뿐일 것이다. 모조품일 뿐이다. 라고.
예술가의 세계란 쟁투와 질투, 야망과 절망, 책모(策謀)와 불성실 등이 소용돌이치는 절망적인 곳이며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선인(善人)만에 한한다고 할 수는 없다. 끈질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겸허하고 탈속적(脫俗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희대의 위험은 성공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그림에서 받는 쾌락의 충격은 소생하는 기쁨의 체험. 전달된 감동에 의한 충격인 것이다.
보링거는 「미(美)의 기쁨은 대상화된 내심의 기쁨이다」라고 말했다.
동양의 초월적 경향
세계적인 조류라고도 한다. 듣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젊은 예술가들은 그것을 극히 심상적인 표현 양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추상'이라는 말의 의미는 사전을 찾아보면 물체 실재의 행동, 혹은 개개의 열에서 동떨어진 '구체적이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예술가의 눈앞에 있는 개개의 대상에서 외관의 기계적인 재현보다도 그 의견에 따르면 진리에 보다 가까운 본질을 추출한 회화를 가리켜 말하기 위해 쓰였던 것이다.
세잔느는 대상이 갖는 본질적 특성은 그 구체성이며, 그런 까닭으로 자연으로부터 추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의 형식적 통일에 의하여 결정된 색채의 배치로서 회화 공간을 완성했다. 균형이 잡혀 있고 색채가 조화되어 있으면 작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주제 같은 것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회화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주제이며 아름다운 것에 영원한 기쁨이었다.
시경 뒤 건물 (A Building behind the Municipal Police Station)
1978, 캔버스에 유채
뒷골목 (홍은동) _ Back Alley (Hong eun-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홍은동 뒷골목 _ (Back Alley of Hong eun-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7, 캔버스에 유채
북창동 길 (Street of Bukchang-dong)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 (Scene of an Alley)
연도 미상, 종이에 색연필
여인 (A Woman)
1978, 종이에 펜
소녀 (A Girl)
1980, 종이에 색연필
은지화 (Foil Drawing)
1979, 은박지에 유채
은지화 (Foil Drawing)
연도 미상, 은박지에 유채
은지화 (Foil Drawing)
연도 미상, 은박지에 유채
박고석과 함께한 원계홍
(Guei-Hong WON with PARK Kosuk and His Friends)
제2회 개인전 《원계홍 근작전》
(1979. 10.17 - 10.23)에서의 원계홍
(주명덕 촬영)
여행지에서의 원계홍
박고석 등과 여행지에서 함께한 원계홍
야외에서의 원계홍
제2회 개인전 《원계홍 근작전》
(1979. 10.17 - 10.23)에서 둘째 딸과 함께
🖼️
원계홍 화백의 작품은 주로 1970년대에 작업한 10호 내외의 유화이다. 골목 풍경과 정물화가 주를 이루며, 나머지는 인물화와 추상화, 그리고 드로잉 등이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 말 작업한 골목 풍경 연작은 한국의 경제개발 이전 서울 변두리의 뒷골목을 단순하고 명쾌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때 텅 빈 골목길은 사실 묘사에 충실하기보다는 원계홍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세잔느의 풍경화처럼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과 명료하고 순도 높은 색채로 담아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다가서 보면, 그의 전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회색조와 머뭇거리는 붓 자국들은 아직 무엇인가 더 그려야 할지 아니면 그만 멈추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완성인 양 캔버스 전체를 배회한다.
이러한 원계홍의 의도적 배회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바로 원계홍 회화의 고유성일 것이리라.
그것은 순수하고 우직하게 창작에만 몰두했던 한국의 초기 서양화가들처럼 원계홍 역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에만 매진했던 데서 오는 예술혼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은 그 태동기에 새로운 문물인 서양화를 만나며 재료와 기법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관심을 보였지만, 놀랍게도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은 작가의 예술적 역량과 열정을 일깨우는 것으로 끝나고, 결국 어떤 사조에도 휩쓸리지 않은 채 자신들의 고유성을 창조해냈다.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0도 즉 "글쓰기의 0도(롤랑 바르트)", 혹은 탈신화화한 미술 덕분에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 혹은 읽어버린 예술의 본질이 원계홍의 캔버스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우리가 원계홍의 회화를 대면하며 어떤 특정 사조나 시대와 정치에 물들지 않은, 혹은 선전이나 상업성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진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 현대미술의 사라짐의 위기에서 그의 예술은 결코 그러한 잡다한 시대적 상황들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출처: 전시장 내 설명
-김현숙 (한국근현대미술사가), 「원계홍의 작품세계」 (2023) 中-
정물 (Still Life)
1962, 캔버스에 유채
정물 (Still Life)
1976, 캔버스에 유채
1. 정물 (Still Life)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2. 정물 (Still Life)
1975, 캔버스에 유채
1. 모자와 우산 (Hat and Umbrella)
1976, 캔버스에 유채
2. 꽃바구니 (Flower Basket)
1976, 캔버스에 유채
1. 장미 (Roses)
1978, 캔버스에 유채
2. 장미와 레몬 (Roses and Lemons)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꽃(튤립) _ Flowers (Tulips)
1978, 캔버스에 유채
정물(도깨비부채) _ Still Life (Rodgersia Podophylla)
1977, 캔버스에 유채
튤립(Tulips)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꽃(글라디올러스) _ Flowers(Gladiolus)
1974, 캔버스에 유채
1. 설악산(Seoraksan)
1978, 캔버스에 유채
2. 설악산(Seorak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산동네 (Hillside Village in Seongbuk-dong)
1978, 캔버스에 유채
여름(인천) _ Summer(Incheon)
1978, 캔버스에 유채
산, 구름 (Mountain and Clouds)
1976, 캔버스에 유채
북한산 (Bukhan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북한산 (Bukhab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산길 설악 (Seoraksan Trail)
1978, 캔버스에 유채
설악산 소나무 (Pine Trees in Seoraksan)
1978, 캔버스에 유채
북한산 (Bukhan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북한산 (Bukhan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보현봉 (Bohyeonbong)
1979, 캔버스에 유채
산 (Mountai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북한산 (Bukhansan)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창틀 너머 인왕산 (Inwangsan View from the Window)
1978, 캔버스에 유채
창틀 너머 인왕산 (Inwangsan View from the Window)
1978, 캔버스에 유채
여인(마리아) _ (A Woman (Maria))
1977, 캔버스에 유채
마리아 (Maria)
1978, 캔버스에 유채
소녀 (A Girl)
1977, 캔버스에 유채
장미 (Roses)
1973, 1980 캔버스에 유채
1. 장미 (Roses)
1977, 캔버스에 유채
2. 장미 (책) _ Roses (A Book)
1978, 캔버스에 유채
장미 (Roses)
1977, 1977, 1978, 1977 캔버스에 유채
장미 (Roses)
1978, 캔버스에 유채
장미 (Roses)
1978, 캔버스에 유채
정물 (Still Life)
1978, 캔버스에 유채
장미와 레몬 (Roses and a Lemon)
1977, 캔버스에 유채
장미 (Roses)
1977, 1978 캔버스에 유채
기와지붕 (명륜동) _ Tiled Roofs (Myeongnyun_dong)
1977, 캔버스에 유채
기와지붕 (구름) _ Tiled Roofs (Clouds)
1978,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풍경 (산동네) _ Scene of an Alley in Seongbuk-dong (Hillside Village)
1977, 캔버스에 유채
북창동길 (Scene of an Alley in Bukchang-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용산우체국 (Yongsan Post Office)
1979,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회현동 (Hoehyeon-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홍은동 유진상가 뒷골목 (Back Alley of the Yujin Sang-ga(Plaza) in Hongeun-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뒷골목 (Back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거리풍경 (Street Scene)
1978, 캔버스에 유채
지붕 (Roofs)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8, 캔버스에 유채
보안등이 보이는 풍경 (Scene of an Alley with a Security Light)
1978, 캔버스에 유채
동네골목 (궁정동) _ (Scene of an Alley in Gungjeong-dong)
1980,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8, 캔버스에 유채
난간이 있는 산동네 (Hillside Village with Handrail)
1978, 캔버스에 유채
청운동 산동네 (Hillside Village in Cheongun-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산동네 (Hillside Village in Seongbuk-dong)
1977, 캔버스에 유채
축대가 보이는 풍경 (Scene of an Alley with an Embankment)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in Seongbuk-dong)
1978, 캔버스에 유채
지붕 (Roofs)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산동네 (Hillside Village)
1979, 캔버스에 유채
수색역 (Susaek Station)
1979, 캔버스에 유채
골목(까치집) _ Scene of an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회색 지붕 (Gray Roofs)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장충동 1가 뒷골목 (Back Alley of Jangchung-dong 1-ga)
1980, 캔버스에 유채
약수동 골목 (Scene of an Alley in Yaksu-dong)
1978, 캔버스에 유채
지붕 (Roofs)
1978, 캔버스에 유채
홍제동 (Hongje-dong)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Seongbuk-dong)
1977, 캔버스에 유채
성북동 골목
(Scene of an Alley in Seongbuk-dong)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양동)
(Scene of an Alley in Yang-dong)
1979,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1978, 캔버스에 유채
골목풍경 (Scene of an Alley)
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뒷길 (Back Alley)
1979, 캔버스에 유채
🖼️
원계홍 화백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수 있게 해준 공로는 역시 일찌감치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깊은 공감력을 가졌던 두 분의 소장가 김태섭과 윤영주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예술 애호가였던 두 분은 탁월한 안목으로 일찍이 원계홍 작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작품을 수집하고 소장함으로써, 이름 없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뻔했던 작가의 작품을 보호했다. 어떤 작품을 가치 있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데는 작가의 수준 높은 창작 활동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하고 인정함으로써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소장가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 어떤 사심도 없던 미술계의 기인이자 외골수였던 원계홍은 두 예술 애호가의 관심 덕분에 다시 세상에 나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못다 핀 작가의 작품을 보듬은 소장가의 마음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길 바라며, 두 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출처: 전시장 내 설명
-오광수(미술평론가), 「원계홍의 세계_심상(心象)과 본질」 (2023) 中-
-김태섭, 「나의 소장기(所藏記)」 (2023) 中-
-운영주, 「그 너머(Beyond) - 소장가의 원계홍론」 (2023) 中-
야외에서 작업 중인 원계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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